"며느리에 자율성 줄 때 시부모 잘 모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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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 여성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 예비 남편이 '장남' 이라면?

가족과 친구들은 걱정스럽게 물을 것이다. "설마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시누이랑 시동생은 몇이야" "각오는 돼있겠지" 라고.

우리 사회에서 현재 '장남' 이라는 지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맏며느리' 의 역할은 과거와 비교해서 어떻게 변했나. 그 변화가 우리 시대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학 박사 김현주(40)씨가 쓴 『장남과 그의 아내』(새물결 발간)는 장남 부부의 결혼생활을 소재로 우리 사회 가족관계 지도를 그려낸 보고서.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좀처럼 학구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가족관계를 33쌍의 장남부부에 대한 생생한 인터뷰와 사회학적 이론으로 분석해 냈다.

김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요즘 여성들은 '맏며느리 의식' 이 별로 없다. "나는 맏며느리야" 하고 말하는 대신 "우리 남편이 장남이야" 라고 대답하기 좋아한다.

비슷한 표현 같지만 '장남의 아내' 라는 표현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요즘 여성들이 전통적인 맏며느리 역할을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머니가 뭘 요구하면 '그거 아드님한테 바라야 하는데 왜 나한테 바라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난 우리 시어머니한테 신세진 일이 없거든요. " 김씨가 인터뷰한 어느 '장남의 아내' 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장남 부부가 남편-아내-시부모로 이루어진 '셋의 관계' 에서 썩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 사람은 의견 조율이 필요한 관계다.

그러나 시어머니라고 해서 '아들이 자기편' 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박사는 "사랑해서 결혼을 택한 요즘 남편들은 효의 강박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면서 "세대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변화를 수용하는 부모 세대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고 덧붙였다.

부모 세대와 장남 부부의 동거 여부 역시 여전히 예민한 문제. 일부에서는 '며느리 견습기간' 을 갖기 위해 6개월~1년간 부모와 함께 살고 분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족관계가 일그러지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한다. 고부 갈등이 불거져 서둘러 분가하고, 향후 동거의 가능성마저 잃기도 한다.

김씨는 "시부모로부터 부부관계의 자율성을 존중받고 있는 며느리일수록 시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 말했다.

1988년 결혼한 김씨는 외아들의 아내로 역시 '맏며느리' . '혹시 어려운 시집살이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눈치라도 챈듯이 김씨는 "며느리의 자율성을 존중해준 시부모 덕택에 오히려 이 문제를 한걸음 떨어져 조망할 수 있었다" 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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