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달중 교수의 정치 프리즘] 레임덕과 동의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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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애초에 IMF 환란이 있었다. 그 다음에 나라 전체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국가적 목표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고 하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전도(前途)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경제가 비틀거리고 사회가 파편화 되고 있는데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YS의 전철을 밟아 경제위기와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의 망령이 다시 떠돌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YS와 DJ의 '반독재 경쟁' 은 우리사회에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고 이끌어 왔다. 시대가 이들과 함께 침상을 나누려고 몸부림 쳤다. 이에 반해 DJ와 YS의 '국가통치 경쟁' 은 불행하게도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기 보다는 시대에 끌려다니다 끝장나는 게임의 형국이다. 시대가 이들의 침상에서 뛰쳐 나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국민들은 DJ·YS 동시선택

사실 민주화와 더불어 YS와 DJ 중 누가 더 나은 통치자일까 하는 질문은 정말 어려운 국민적 선택의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하기 보다 두 사람을 다 선택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YS가 떠난 곳에서 DJ가 시작하도록 배려함으로써 YS가 치유하지 못한 한국적 고질병을 DJ가 치유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DJ가 향해 가는 곳이 바로 YS가 떠난 곳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DJ의 개혁열차가 YS의 종착역으로 향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YS와 마찬가지로 DJ도 민주화의 구세주에서 통치의 실패자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물론 DJ의 경우는 YS의 경우와 다르다. 소수파의 대통령으로서 넘어야 할 개혁 장애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YS가 개혁 장애물의 정면돌파전을 시도했다면, 그는 정면돌파전 대신 터널을 파고 산기슭을 돌아가는 우회전을 펼치지 않으면 안됐다. 그만큼 기득세력의 저항과 주류 언론들의 공격이 역대 어느 대통령의 경우보다 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국민의 정부가 오늘의 현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는 쉬울 것 같지 않다. 각종 여론조사가 나타내주듯 그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복자들' 처럼 군림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동의를 획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피정복자들' 과의 대화를 거부함은 물론 그들의 충고나 비판의 합법성마저 매도해 버렸던 것이다.

미국에서 루스벨트가 위대한 대통령으로 칭송 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뉴딜개혁에 대한 비판세력을 관용적으로 다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도 어느 대통령 못지 않게 비판세력에 거칠게 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비판의 정당성을 존중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동의를 구하는데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결과 뉴딜개혁의 성공적인 추진과 함께 미국의 재건을 이끌어 낸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됐던 것이다.

*** 비판세력을 포용 했으면

하지만 DJ는 루스벨트와 같이 비판세력의 정치적 동의를 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 IMF 극복에 대한 국민적 합의만 믿고 구조개혁을 위한 그들의 정치적 동의를 얻어내는 노력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국민적 합의 없이는 어떠한 정치사회도 존속할 수 없지만, 국민의 정치적 동의 없이는 어떠한 민주정부도 개혁을 추진하거나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레임덕에 접어들고 있는 DJ로서는 다음 둘 중 하나의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YS의 전철을 밟아 사정기관을 동원한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의 채찍을 휘두르든가, 아니면 국민의 정치적 동의를 구하는데 보다 심혈을 기울이든가이다. 어느 것이든 그에게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자만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열어갈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이 절실한 시점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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