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프리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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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사랑을 나누고/한 잔을 마시는 일 만은 빼고…" .

귀가 솔깃해질 꼬드김이다. 영국시인 도리스 레싱의 이 시 구절을 빌려 마르크시즘의 노동숭배 이념에 조롱 한바가지를 퍼부었던 멋쟁이가 있었다.

웬걸 그는 마르크스의 사위였다. 파울 라파르그, 그는 털북숭이 장인 어른 주위를 얼씬거렸던 속류(俗流)좌파들을 비판했다.

라파르그의 생각이 담긴 정치 팸플릿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 다. 끝맺음을 읽어보자.

"오!게으름이여. 예술과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인간 고통에 위안이 되어주길!"

사학자인 한양대 임지현 교수에 따르면 라파르그는 사회주의 역사에서 노동숭배에 대항했던 첫번째 인물이다.

그가 내건 모토는 '매력적인 노동' 이었다. 일과 놀이가 결합된 '디오니소스적인 노동해방' 말이다.

사람 망가뜨리기 십상인 프로메테우스식 진보일랑은 저 멀리 걷어치우자는 것인데 훗날 아도르노.베냐민 등에게서 메아리를 얻게 된다.

이런 디오니소스적인 삶이 요즘 지구촌에 아연 뜨고 있다. 뉴스위크 한국판 최근호는 이웃 일본에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프리터' 가 유행이라고 전했다.

프리터란 프리(free)와 근로자를 뜻하는 아르바이트(arbeiter)를 합성한 일본식 신조어. 즉 알량한 평생직장에 몸 바쳤던 부모세대와 달리 필요할 때 파트타임으로 일한 뒤 나머지는 즐기며 살겠다는 X세대를 말한다.

'10년 불황' 끝에 나온 일본의 세태가 억지춘향이라서 조금은 썰렁할 거다.

그렇다면 청년실업률이 일본(6.7%)을 훌쩍 뛰어넘는 한국(16.9%)은 어떨까?

일본문화평론가라는 멀쩡한 명함을 가진 김지룡이 바로 프리터 확신범이다.

명문대 출신에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서슴없이 말한다. "생산과잉이 문제되는 시대에 농땡이 친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

즉 필요할 때 일감을 찾겠다는 비(非)정형 노동이 그의 소신이다. 그의 책 『인생 망가져도 고!』(글로리아)에 나오는 선언이다.

자, 장마도 끝물이고 바캉스 시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가장 가혹한 근로시간을 가진 한국이지만 이제 우리사회도 놀 때는 좀 멋지게 놀아볼 필요도 있다.

'재충전을 위한 휴가' 입네 뭐네 하는 공허한 수사(修辭)자체부터 일단 제쳐놓을 일이다. 이어령씨 말대로 개미와 배짱이의 구분 자체가 없어져버린 시대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개짱이' , 라파르그 말대로 '매력적인 노동' 을 할 수 있는지를 이 휴가철에 음미해볼 일이다.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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