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4시] 왜곡 거부한 일본 학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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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일본 정부가 이달 초 한국.중국 정부의 우익 역사 교과서 재수정 요청을 거부했을 때만 해도 '많은 중학교가 왜곡 교과서를 채택할 것' 이란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왜곡 교과서를 만든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새역모)측이 자신들의 교과서 채택을 위해 펼친 로비 공세가 상당했던 데다 일본 정부마저 '새역모' 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됐기 때문이다.

'새역모' 는 이에 따라 '전국 중학교 10% 채택' 이란 당초 목표를 12%로 상향 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사립중학교에 이어 2개 시.8개 마치(町)에 30개 공립중학교가 있는 도치기현 시모쓰가(下都賀)지구 교과서채택협의회가 지난 12일 '새역모' 교과서 채택을 결정하자 그 꿈은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며칠 뒤 대역전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모쓰가 지구에 소속된 고쿠분지마치(國分寺町).후지하라마치(藤原町).고야마(小山)시 교육위원회 등이 반대하고 나서 채택협의회 결정이 백지화된 것이다.

시나 마치교육위가 지구채택협의회 결정에 '반란' 을 일으킨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지구교육위를 믿었던 '새역모' 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교육위들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뒤에는 지역주민들의 '압력' 이 있었다.

아사히(朝日)신문 18일자에는 도치기현 고야마시의 어머니들이 " '새역모' 교과서를 채택말라" 는 현수막을 들고 교육위원들에게 호소하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동안 많은 시민단체들이 '새역모' 교과서 반대운동을 펼쳐 왔지만 최근에는 '비난받는 교과서를 자식이 배우게 할 수는 없다' 며 반대운동에 나서는 학부모들이 많아졌다.

도쿄(東京) 스기나미구에서는 지난 4월부터 학부모들이 '새역모' 반대 모임을 만들어 매주 가두 반대운동을 펼치고, 반대서명을 교육위에 제출하기도 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학부모는 19일 기자에게 "자민당 의원이 교육위에 '새역모' 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 는 고발 e-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같은 '풀뿌리' 반대운동은 우익세력의 편법을 감시하고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시모쓰가 채택협의회 결정도 학부모의 힘에 의해 무산된 것이다.

도쿄에서는 학부모의 요구로 채택 과정을 공개하는 지역 교육위가 늘고 있다. 자녀에게 참교육을 시키겠다는 학부모들이 있어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 의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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