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안도현 '아버지의 런닝구'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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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백기(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 안도현(1961~ ) '아버지의 런닝구' 중

안도현의 시들은 유쾌하다. 그리고 정밀하게 계산돼 있어 독자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러나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그의 시의 운산(運算)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그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이 '런닝구' 같은, 미리 계산되지 않은, 그래서 생활의 냄새가 더욱 물씬 나는 작품이다.

80년대의 어느 무렵에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에게 했던 말, 재능이 겨우 그것뿐이냐던 비아냥은 이제 취소돼야 한다. 그는 일급의 언어예술가다.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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