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머리' 늘린 공무원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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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앙행정기관 등산대회' 라는 게 있다. 기관마다 열명씩 참가하되 이중 국.과장급 및 여직원이 한명씩은 포함돼야 한다. 지난 4월 북한산에서 열린 올 대회엔 54개 기관 가운데 36곳이 참가했다.

불참한 기관 중 상당수는 직원수가 워낙 적어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을 직급별로 찾아 팀을 짤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정부기관 중 일반직 공무원 수가 1백명이 채 안되는 곳이 10여군데 되는데 이들도 장(長)은 다 장관 아니면 차관급이다.

현 정부는 1998년 2월 출범하면서 '작은 정부' 를 기치로 내건 뒤 지금까지 국가공무원은 16%, 지방공무원은 19%를 줄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6만3천명에 달하는 공무원 감축이 주로 하위직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부(部).처(處).청(廳)으로 끝나는 부처는 김영삼(金泳三)정부 때나 현재나 38개로 똑같다. 부총리 제도를 없앴다가 다시 만들었고 공보처를 폐지한 뒤 얼마 안돼 국정홍보처를 만드는 등 몇 차례 '헤쳐 모여' 가 있었을 뿐이다. 장.차관 숫자는 줄지 않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장관급이 위원장인 '위원회' 가 몇 개 더 생겨 전체 '높은 자리' 수는 다소 늘었다. 장관급은 빼고 장관 자리만 놓고 봐도 <표>에서 보듯 미국.일본은 우리보다 인구가 훨씬 많지만 장관 수는 적다. 인구에 비례한 국회의원 수도 미.일은 상.하원을 합쳐도 우리보다 많지 않다. 그렇다고 이들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국정 운영을 잘 한다는 평가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 기관이 지나치게 세분화돼 엇비슷한 일을 하는 데가 많다 보니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최근 정보기술 관련 시책을 놓고 정통부.산자부.과기부가 서로 자기 일이라고 '밥그릇 싸움' 을 벌인 게 그런 예다. 재경부와 기획예산처, 재경부와 금감위의 역할 구분도 어정쩡하다.

진념(陳稔)부총리는 올 상반기 일하는 날 1백47일 가운데 32일을 국회에 출석했다. 닷새에 하루꼴이 넘는데 국.과장들까지 줄줄이 장관을 따라다니는 우리네 관행을 고려하면 그런 낭비도 없다. 국회의원.장관 수를 대폭 줄인다면 그 때도 이런 일이 계속될까 싶다.

'윗분'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자주 바뀌기도 한다. 중앙인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지난해 말까지 2년10개월간 차관급 이상을 지낸 사람은 1백65명이다. 숫자가 많은 데다 수시로 갈리다 보니 소신 행정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권위도 떨어진다.

최근 민간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경제부처 전직 관료는 "최대의 공무원 사기 진작책은 승진이지만 높은 자리를 자꾸 만든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 말했다. 자리가 늘었는데도 승진을 못하면 상대적인 박탈감까지 겹쳐 사기는 더 떨어진다는 것이다.

뒤처진 나라일수록 '높은 사람' 이 많은 점도 눈에 띈다. 러시아는 장관도 많지만 부총리도 다섯명이나 된다. 북한은 부총리 두명 외에 부총리급 당 비서만 여덟명이다.

뉴질랜드.싱가포르 등 공공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의 공통분모는 철저히 '작은 정부' 를 지향한 점이다. 일본도 올 초 22개 부.성.청을 13개로 확 줄였다.

"중소기업인들은 민원을 할 때 산자부.중기청.중기특위 중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쩔쩔맵니다. 한 마디로 정부 부처가 너무 많아요. 하위직만 줄여 놓고 개혁했다고 하면 국민이 감동을 받겠습니까?" 최근 한 벤처기업 임원이 기자에게 보내온 e-메일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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