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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기행] '현대판 향약' 갖기 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1리.

마을 앞 도로변에 세워진 아담한 정자 두 개가 주민들의 쉼터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얼마전 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짚을 엮어 지붕을 얹었다.

정자 옆의 표지판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부모님께 효도하자’‘내가 먼저 인사하자’‘남을 칭찬하는 주민이 되자’‘연구하는 주민이 되자’.

올해 초 회의를 거쳐 주민 스스로 정한 ‘마을 규범’(里訓)이다.

현대판 향약(鄕約)으로 불리는 마을 규범이 이기주의에 물들어 가는 이 마을을 훈훈한 인정이 흐르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

김규환(金圭煥 ·56)단촌면장이 ‘1마을 1향약 갖기운동’에 나서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金면장은 “젊은이들이 어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이웃 간에도 벽이 생기는 등 농촌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심이 각박해졌다”며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1마을 1향약 갖기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말 단촌면의 15개 마을 주민들에게 숙제(?)를 냈다.마을 주민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정해 실천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더이상 개입하지는 않았다.

곧 이어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한 글들이 정해졌다.주민들은 이 내용을 돌에 새기거나 표지판에 써 마을 어귀에 세웠다.

방하리의 향약은 ‘협동’.세촌1리와 상화2리는 절약 ·웃어른 공경 ·인사하기 ·이웃사랑 등 5개항씩의 비교적 긴 내용이다.

장림리는 겸손하고 화목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마을이란 ‘겸화근검지촌’(謙和勤儉之村)으로 정했다.

구계1리 김덕룡(80)옹은 “처음엔 주민들이 표지판을 그냥 지나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최해란(18 ·경안여자정보고 3년)양도 “향약 덕분에 우리 마을의 청소년·아이들은 어른들께 인사를 잘한다”며 자랑했다.

면 소재지인 하화2리의 향약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언어필신’(言語必愼).‘말은 반드시 신중하게 하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면내 15개 마을 중 가장 번화한 곳으로 어느 동네보다 진정·투서가 많았던 곳이다.시골이긴 하지만 옆집 사람과 인사조차 않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면사무소 장용주(張龍周 ·48)총무담당은 “향약 제정 이후 투서도 크게 줄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언어필신’이 일등공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송나라의 여씨 향약을 본따 처음 시행한 향약은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過失相規),예의로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患難相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옛 자치규약이 현대적 의미로 다시 태어나 농촌을 하나로 묶는 구심체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단촌면은 향약을 농촌의 정신개혁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추진하고 있다.마을마다 담당 공무원을 지정해 다른 마을은 어떻게 향약을 지켜나가는지 소개하는 작업이다.

金면장은 “주민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요즘에는 단촌면의 향약을 벤치마킹하는 단체나 개인도 늘어나고 있다.

의성군은 향약을 올해 군의 주요사업으로 정해 다른 면에도 보급키로 했다.

金면장은 “향약은 법률 등 강제규범보다 중요한 마을 덕목”이라면서 “향약의 실천을 통해 단촌면을 인정이 넘치는 고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의성=홍권삼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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