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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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15면

9·11 테러사건과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 필자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건과 관련된 환자를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다. 중남미계인 10대 A양은 아버지가 9·11 사건으로 실종된 후, 조울증상과 자살 충동을 보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나를 찾아 왔었다. 아들이 이라크전에 참가했다가 숨진 여성 B씨 역시 1년 이상 먹고 잠자는 기초적인 일상생활조차 하지 못했다. 꼭 사회적 이슈가 되는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을 경우 오랫동안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화재로 한꺼번에 남편과 아이를 잃은 중년 여성 C씨는 초기 면담 때,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 없이 자상했던 남편이 자살한 후 필자를 찾아왔던 D씨는 “남편을 따라 죽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해 상담 도중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혼자 살아남은 E씨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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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 가족을 잃은 경우 사람들은 인종이나 문화에 상관없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큰 충격으로 인한 혼란, 상실감과 우울감, 운명에 대한 분노 등으로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면서 애도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러나 병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누군가가 죽었는데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이전과 똑같이 생활한다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부정의 단계이거나 슬픈 감정을 신경증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외할머니도 전쟁 중에 두 아들을 잃은 후, 꽤 오랫동안 모르는 사람들이 자식에 대해 물어오면 마치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죄책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주로 ‘만약’으로 시작하는 생각들이다. ‘만약 남편 출근 시간을 조금만 늦췄더라면’, ‘만약 아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반대했더라면’, ‘만약 그 직장에 가지 못하게 했더라면’ 하는 등이다. 사고가 나기 전에 불행을 미리 막지 못한 자신을 비난한다. 사고 수습, 장례 절차, 남은 빚, 가족 부양 등을 생각하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지치게 된다.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다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면역력이 떨어져 실제로 병을 얻기도 한다. 필자의 외숙모는 막내아들을 군대에서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앓다가 돌아가셨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잘못된 간섭은 종종 남겨진 가족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집안의 나쁜 일을 남은 가족 탓으로 돌리거나, 행실 탓을 하거나, 팔자가 드세서 벌어졌다는 등의 말들은 상처를 악화시킨다. 선진국에서는 상사가 났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많다. 유사한 슬픔을 겪는 이들이 모여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가족이라는 완충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사회적 안전망 구축도 되지 않아 힘든 일이 있을 때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천안함에 승선했던 헌헌장부들이 바닷속에서 실종된 사건이 온 나라와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하고 있다. 그들의 헌신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우리의 장한 아들들과 그 가족을 위해 우리 사회가 두고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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