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회 칸영화제 '세계 스크린' 평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지난 12일 프랑스 칸은 보스니아 영화 '주인 없는 땅'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에 아낌 없는 갈채를 보냈다.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자 박수를 터뜨렸다.

'주인 없는 땅' 은 칸영화제에 처음으로 선보인 보스니아 영화. 지난달 말 경쟁작 목록이 발표될 당시 제기됐던 일부 시각, 즉 주최측이 지역안배 차원에서 고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1993년 보스니아 분쟁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평온하게 살아왔던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이 서로 총을 겨눠야 했던 비극적 상황을 경쾌하게 풀어낸 '주인 없는 땅' 은 묵중한 주제와 코믹한 화면으로 큰 공감을 끌어냈다.

올 칸에서 할리우드 명장인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지옥의 묵시록' 을 22년 만에 재편집해 전쟁의 비도덕성을 준열하게 꾸짖었다면, 전세계에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타노비치 감독은 '주인 없는 땅' 으로 전쟁의 무모함을 통쾌하게 비웃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진지의 중간에 위치한 한 참호에서 우연히 마주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군인 두 명이 빚어내는 우스꽝스런 소동으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한 것. '공동경비구역 JSA' 가 연상될 만큼 비극과 희극의 어우러짐이 뛰어났다.

올 칸영화제에선 이처럼 제3세계 영화의 약진이 눈부셨다. 장편 경쟁작 스물세편 가운데 열네편이 공개된 15일 현재 이란 영화 '칸다하르' 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도 참석했던 이란의 대표 감독인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연출한 '칸다하르' 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고발했다.

캐나다로 망명을 떠났던 여성 저널리스트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동생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동생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온갖 역경을 통해 여성의 삶을 옥죄는 그릇된 사회관습과 탈레반 정권의 비인간적 여성정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이 두 작품은 최근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 아시아 영화의 약진(올 칸에도 일본 영화 다섯편, 대만 영화 두편이 경쟁부문 진출)과 함께 지구촌 영화의 평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제작기술의 공유가 넓어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향후 영화의 승부는 각 지역의 고민을 전세계인이 공감하는 보편적 언어로 풀어내는 데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주목할 만한 시선' 에 오르며 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칸에 소개됐던 '검은 호랑이의 눈물' (위싯 사사나티엥)도 서부영화를 패러디한 형식에 신분을 뛰어넘는 비극적 사랑을 담아 서양인의 주목을 받았다.

디지털 네가의 조성규 대표는 "칸 마켓에서도 할리우드 기법에 동양적 세계를 가미한 태국 영화가 크게 부상했다" 며 "최근 급성장한 한국 영화도 외국에서 더욱 붐을 일으키려면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소재.주제의 고유성과 제작.판매의 국제화가 동시에 진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올 마켓에서 미국 메이저 배급사와 수출가 1천만달러를 협상 중인 김성수 감독의 '무사' 가 한 예가 될 수 있다.

미국 영화에 대한 평가도 양호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으론 이례적으로 경쟁부문에 오른 '슈렉' (앤드루 애덤슨)의 열기가 뜨거웠다.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서양의 고전동화를 비틀며 '추한 것도 아름답다' 는 메시지를 담은 '슈렉' 은 각국 평론가들로부터 고른 평점을 받았다.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차지했던 '어둠 속의 댄서' 의 맥을 이은 바즈 루만 감독의 뮤지컬 영화 '물랭루주' 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현란한 화면과 역동적인 춤, 그리고 절절한 사랑 얘기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소 상투적인 소재와 과다한 특수효과로 뮤지컬 영화의 색깔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럽 영화는 비교적 저조한 편이었다. 영화제를 의식한 듯한 예술성 강한 작품은 다수 선보였으나, 내용.구성 등이 제작 의도와 부합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스페인 영화 '파우와 그의 형제' (마르크 레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동생의 과거 행적을 추적하는 형의 얘기와 자유분방한 성관계가 혼동스럽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여성 친구 두명의 갈등과 집착을 다룬 프랑스 영화 '리허설' (카트린 코르시니)도 사소한 일상을 노출하는 데 치중한 까닭에 신선감과 설득력이 떨어졌다.

칸=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