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국민이 실험대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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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 전 이헌재(李憲宰)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미국에서 몇가지 의미있는 말을 했다. 워싱턴에서 열린 '우드로 윌슨상' 수상식장에서 그는 "한국의 외환위기 초기 국제통화기금(IMF)이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책권고를 하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됐다" 고 지적했다.

***개혁프로그램 오류 인정

그는 또 "위기의 주원인은 기업부채였는데 정부채무로 오인, 긴축하는 바람에 역효과(adverse effect)를 냈음을 인정한다. 이는 또 잘못된(逆) 선택(adverse selection)으로 이어져 살 수 있는 기업도 못 살렸다" 고 덧붙였다. 아울러 "정책과 국제기준을 도입하기 전에 위기 또는 문제의 본질과 시행능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李장관이 누군가. 현 정부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외환위기 극복의 선봉에 서서 명쾌한 논리와 쾌도난마(快刀亂麻)식 일처리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 '개혁의 전도사' '저승사자' 등으로 불렸던 인물 아닌가. 부채비율 2백%, 금융기관 통폐합.공적자금.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빅딜 등 주요 금융.기업 개혁조치들이 그의 재임기간 중 이뤄졌다. 그 덕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드로 윌슨상까지 받았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당시 정책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IMF의 오류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국내외 학자들이 숱하게 지적했다. 李장관의 발언도 IMF를 겨냥한 것으로, "다른 개발도상국들을 위한 교훈" 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나 배경이야 어찌 됐든 이는 결국 IMF의 권고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따랐던 우리의 초기 개혁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었음을 개혁의 주도자가 공식 인정한 것 아닌가. 그토록 당당하고 논리정연했던 구조조정의 당위성, 그리고 대량부도.대량실업의 상당부분이 그릇된 판단의 결과라니. 정부 선택이 유일한 활로인 줄 믿고 금가락지까지 바치며 고통을 참았던 국민은 무언가.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백번을 양보해 당시엔 IMF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그러면 지금은 '문제의 본질' 을 제대로 파악, '바른' 선택을 하고 있나. 불행히도 진념(陳稔)경제팀 역시 그 전철을 밟고 있다.

대우자동차.서울은행.대한생명…. 부실덩어리들은 몇달 몇년을 끌면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금융개혁에 1백30조원이나 쏟아부었지만 성과는 턱없이 미흡하다. 나라 빚은 늘고 물가는 오르고 성장률은 떨어지고 수출은 둔화되는 등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형국이다. 특히 국민과 나라경제를 볼모로 한 '현대 살리기' 는 우리 경제가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이미 12조원 넘게 지원됐지만 여전히 한치 앞도 안보인다. 왜 이런가. 모두 사태의 본질이나 우리의 실력, 대내외 여건변화 등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미봉과 눈가림, 흉내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개혁의 당위성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정책 추진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해도 정책을 시행하려면 부작용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 사전조사는 거쳐야 한다. 국민생활과 나라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더욱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전술.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아마추어 관료들은 그런 과정은 생략한 채 되레 '개혁' 이란 명분 아래 설익은 실험들을 더욱 강도 높게 밀어붙이고 있다.

***검증 안된 정책은 자제를

외국에서 좋다는 제도나 시스템은 우리 실정이나 능력은 무시한 채 일단 들여놓고 본다. 그래 놓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경제뿐인가. 의약분업과 교육정책에 있어 국민은 서투른 관료.정치권의 칼자루에 목숨을 맡긴 실험실의 모르모트에 불과하다.

정부는 지금도 현대 등 잠복한 위기요인들이 언제 일시에 터질지 자신도 모르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폭탄 돌리기' 라고 할까. 그리고 국민은 이런 정부에 나라운명을 통째로 맡긴 신세가 됐다. 陳부총리에게 묻는다.

길게 잡아 1년후 "당시 정책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며 고개 숙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李장관의 자성(自省)과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그리고 국민을 담보로 한 검증되지 않은 실험은 자제하자. 국민은 모르모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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