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언론탄압' 흥분한 슈뢰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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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아주 절친한 사이다. 전임자들인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간의 돈독했던 우정을 능가한다는 평이다.

독일어가 유창한 푸틴 대통령은 슈뢰더 총리와 대화할 때 말을 놓는다.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아랫사람에게만 쓰는 독일어의 'Du(너)' 라는 호칭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지난 1월에는 푸틴 대통령 부인 생일을 맞아 슈뢰더 총리 부부가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1박2일간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슈뢰더가 9일 작심을 하고 푸틴에게 한마디 했다.

"국가는 권력을 견제할 언론을 필요로 한다. 언론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고 시장경제고 존재할 수가 없다. "

슈뢰더는 9일부터 이틀 일정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 푸틴과 만났다. 이 자리에선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에 대한 양국간 협조, 러시아의 채무상환 문제 등이 논의됐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러시아의 언론상황에 대해 직격탄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은 것이다. 내정 간섭이라고 항의할 수도 있는 아주 비외교적인 언사였다. 놀란 독일 언론도 이를 대서특필했다.

'슈뢰더, 러시아 언론자유 옹호' (ARD 방송), '슈뢰더, 러에 자유 언론 요구' (디 벨트), '슈뢰더, 언론자유 환기' (슈피겔)…. 하나 같이 언론자유를 강조한 슈뢰더의 발언을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슈뢰더가 '흥분' 한 것은 NTV 방송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탄압 때문이다. NTV가 정부 비판을 계속하자 러시아 당국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NTV 회장을 세금포탈 혐의로 구속했고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은 이 회사를 인수해 버렸다.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대거 축출됐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는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어쨌든 푸틴으로서는 국빈을 초청해 놓고 여간 체면을 손상한 게 아니다. 그것도 가장 친한 슈뢰더로부터 한방 먹었으니 아플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슈뢰더에게 감사해야 한다. 친하니까 '쓰지만 약이 되는' 충고를 해주는 것이다. 푸틴이 아무리 경제를 발전시키고 옛 소련의 영광을 재현한다 해도 언론을 탄압하면 역사에는 '독재자' 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지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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