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 현장 리포트] 2. 열악한 교육환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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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가족은 난곡의 여러 주민들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넉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 영향으로 저는 외환위기 이후 가계가 어려워진 와중에도 우등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올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성인이 된 이상 밤에 공부하고, 낮엔 돈을 벌어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고 싶습니다. "

대학생 安모(20)씨가 최근 몇몇 기업체에 보낸 구직 호소문. 하지만 상당수 저소득층 자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접하게 되는 열악한 환경에 좌절하고 있었다. 방치된 보육과 불충분한 사교육, 부족한 문화시설 등으로 인해 '예비 빈자(貧者)' 로 커간다.

통계청의 도시근로자 가계조사 결과 2000년 상위 10%의 사교육비 지출 비율이 하위 10%의 6.4배에 이르는 등 외환위기 이후 계층별 사교육비 지출 격차는 벌어졌다. 하지만 이 통계에는 실업자 가정이 빠져 있다.

◇ 아이들에게 번진 슬럼문화〓과실치사 사건에 연루돼 가정법원에서 보호관찰 처분을 받고 시립 청소년쉼터에 상담 의뢰된 중학생 김성수(가명)군. 金군이 상담교사에게 털어놓은 또래 문화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金군과 친구들은 모이면 주로 막걸리를 마신다. 동네 어른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어릴 적부터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됐기 때문이다. 술주정도 만만치 않다. 한 상담교사는 "한번은 성수가 밖에서 술을 먹고 들어와 어른처럼 쉴새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고 말했다. 담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金군 또래의 기호품이다. 종종 동네 빈집에 들어가 본드도 흡입했다.

金군은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그나마 공사판에 나가던 어머니는 몇년 전 허리를 다쳐 거동이 힘든 형편이다.

상담교사는 "끝내 학업을 포기한 金군의 모습은 빈곤문화의 전형" 이라며 "이처럼 학교에서 낙오하는 아이들을 구제할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고 말했다.

◇ 방치된 아이들〓초등 4년생 영훈(가명)이의 장래 직업은 '도둑 또는 강도' 다. 선생님.친구에게 "은행 강도가 되어서라도 돈을 벌겠다" 고 공공연히 말한다.

어머니는 영훈이가 다섯살 때 이혼하고 집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영훈이는 여성이나 이혼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얼마 전 한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영훈이는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적힌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에서 '이혼' 이 쓰인 풍선을 터진 뒤에도 계속 짓밟았다.

방과 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친구들과 동네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가끔 여의도공원 등지로 '원정' 가기도 한다. 영훈이는 최근 상담교사에게 "학교도, 공부도 싫다" 며 "중학생이 되면 돈 벌러 가겠다" 고 털어놨다. 상담교사는 이제 열살을 갓 넘긴 영훈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 모성 결핍〓초등학생 정빈(가명.12)이는 스트레스에 의한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 정빈이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할머니가 괴롭히는 데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머리가 빠지는 것 같다" 고 안타까워했다.

1983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가끔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정빈이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욕을 한다. 흉기를 들고 위협한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몇년 전 아버지와 헤어진 뒤 재혼했다. 정빈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이따금 '엄마' 를 소리쳐 부르며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골목길을 질주하는 등 자학을 한다.

학교에서는 교실 바닥에 드러누워 자기도 하고,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등 공격적인 성향마저 보였다. 결국 아버지와 학교 담임교사는 신림종합사회복지관에 정빈이의 상담치료를 의뢰했다. 정빈이를 상담한 복지사는 "아버지가 일을 나가면 정빈이는 할머니의 괴롭힘에 그대로 노출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사무쳐 마음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 말했다.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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