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12. 파주 과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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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내가 어려서 자라난 경기도 파주는 여느 시골과 같은 평범한 곳이었다. 야산들과 구불구불 흐르는 개천들, 논밭과 어우러진 조그마한 과수원…. 하지만 평범하면서도 아담했던 그 곳은 지금도 볼 때마다 애정이 간다.

파주에는 내 그림 작업실이 있는 과수원이 있다. 황해도의 해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농림회사의 파주 출장소장을 지내신 선친이 마련하신 곳이다.

사과와 배가 섞여 있는 과수원 나무 중에는 60년 전 부친과 함께 심은 것도 몇그루 남아 있다. 부친은 내가 대학 재학 중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자 낙담 끝에 황해도 지방의 절로 들어갔다가 해방과 분단의 와중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몇차례의 난리를 겪는 동안 내가 청소년기에 그렸던 그림들을 피란시켜 오늘까지 보존하게 해 준 어머니도 이 과수원에서 돌아가셨다.

이렇듯 파주의 과수원은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이자 내 그림의 고향이기도 하다. 1973년부터는 작업실도 마련해 주말마다 내려간다. 정년은퇴한 요즘은 자주 들르고 주말에는 자고 온다.

이 곳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살아있다. 휴전선 가까운 곳이라 개발이 안돼 풍경도 내 어릴 적 보았던 것과 큰 변화가 없다.

과수원의 능선에 올라가면 어려서 놀러 다니던 마을 오금리(吾今里)가 오리쯤 북쪽으로 바라보인다. 자주 올라가 놀던 신선대나 구미산 같은 야산은 지금도 변함없고, 그 너머로 활짝 트인 넓은 논과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그리고 멀리 북녘땅이 돼버린 산능선도 그대로다.

70여년 전의 까마득한 옛 얘기가 되었지만, 과수원 능선에 올라가 그 쪽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이 어제 일들 같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봄이면 동네 친구따라 앞산 신선대에 올라가 할미꽃을 캐고, 넓은 산소터에서 숨바꼭질하던 일. 논둑길에서 동네 아이를 따라 창칼로 메뿌리를 캐 쪄 먹던 달콤한 맛, 싱아풀 꺾어 씹던 새콤한 맛, 달래 캐어 된장찌개에 넣어 먹던 맛들은 오래오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여름이면 웅덩이나 수로에서 헤엄치며 반두(그물)질 해 잡은 고기를 망태기에 가득 넣어 어머니께 천렵국 끓여달라고 조르던 일,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 칠 때면 부친 따라 메추리 사냥가서 몇마리씩 잡아다 구워먹던 고소한 맛, 눈 덮인 겨울, 땀 흘리며 이산 저산 뛰어 따라가며 잡은 꿩으로 소를 넣어 빚은 만두국의 맛들도 추억 속에 고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청운공립보통학교)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의 기억들이다. 그때부터 나는 종이쪽지에다 사람과 동물 그림을 즐겨 그렸다. 동리 어른들은 내게 "대원대감(애칭)은 그림을 잘 그리니 앞으로 환쟁이가 될 것" 이라고 말하곤 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경복공립중학교(지금의 경복고)에 입학했다. 학업을 열심히 하면서 미술반에 들어 그림을 그렸다.

경복에는 우리나라 화가로는 처음 프랑스 유학을 하고 돌아왔던 이종우(李鍾禹)선생과 일본 도쿄(東京)미술학교 동창인 일본인 사토 구니오(佐藤九二南)선생이 계셨다. 그분은 우리를 열성적으로 지도했다.

같은 경복 선후배로 심형구.유영국.장욱진.임완규.김창억.권옥연.이우경 등 쟁쟁한 화가들이 많다. 열성적인 교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말해주는 산 증거가 아닐까 싶다.

재학 중 선전(鮮展)에 두차례 입선한 나는 졸업 후 도쿄미술학교로 유학보내 달라고 부친께 졸랐지만 반대가 워낙 완강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차라리 대학에 안가겠다고 1년을 놀면서 낚시와 그림으로 버텼으나 끝내 부친의 뜻대로 다음 해 경성제대 예과로 진학하게 됐다. 그러나 전공은 시험치기 위해 겨우 하는 정도였고 문학쪽의 강의를 들으러 다니거나 그림 그리기에 더 열중하는 학생이었다.

아들이 화가가 될까봐 그렇게 겁내던 부친도 내가 일단 법학도가 된 후에는 안심하셨는지 그림물감을 계속 사다주셨다.

졸업 후 극동해운에 근무하던 나는 57년 아무래도 화가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는 오래오래 바라보는 동안 거의 나 자신의 일부가 돼버린 대상이 아니면 잘 그리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파주의 산.과수원.연못은 내 그림의 끝없는 원천이자 소재가 됐다.

청소년기 그림으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백일홍(33년).폐허(36년).언덕의 파밭(38년).뜰(39년).못(40년) 등은 모두 파주의 과수원과 그 주변을 그린 것이다. 뒤의 세 작품은 17, 18, 19회 선전 입선작이기도 하다.

과수원에 작업실을 마련한 70년대에 와서 내 그림은 큰 전환을 맞이했다고 하겠는데 그 원동력은 자연을 재발견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여러가지 소재를 다뤘지만 그때부터는 산.농원.나무.연못 등으로 대상이 압축됐다.

나무 하나, 연못 하나, 산 하나에서 무한히 많은 것을 보게 됐다. 그전에는 그림 몇폭에 나무의 모습을 다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려도 그려도 나무의 모습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은 나무, 같은 잡초라도 계절마다 시간마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다. 자연이 가진 무한함을 알게 된 후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품게 됐고,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동안 좀더 자연 속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나는 특히 사계절에 따른 변화에서 애착을 느낀다. 평범하기만 했던 야트막한 산과 논, 그리고 나무 하나하나가 독특한 애정으로 손짓해 부른다. 산.나무.흙 속에서 우러나오는 무한한 생명력에 압도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하나의 조그마한 생의 미약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무한한 형태, 무한한 색채를 이 조그마한 눈.머리.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연의 힘에 새로운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 같다.

나는 한그루 나무, 한포기 풀, 한줌의 흙을 사랑스러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들은 깊은 곳으로부터 내 화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내 그림이 점점 더 즐거워지고 밝아지고 낙천적이 돼간다고 한다. 그 즐거움은 어린 시절 자연속에서의 경험이 매우 행복했다는 것에서 오는 것같다.

내가 계속 그리고 있는 산과 농원과 나무와 연못은 어린 시절 그곳에서 뛰놀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 떴던 나의 우주였다.

80세가 된 지금도 나는 과수원을 거닐며 어린 날의 느낌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무덤 옆에서 이른 봄에 피어나던 털이 보숭보숭한 할미꽃, 한여름 마당의 꽃밭에서 붉게 타오르던 맨드라미. 언덕 위 파밭에서 피던 파꽃, 사냥가는 부친을 따라가 꿩.오리.노루를 잡던 일.

이런 기억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 생생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내 그림의 빛깔들이 점점 밝아지고 즐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점점 동심으로 돌아가 자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대원 <화가>

<이대원 화가 약력>

▶1921년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출생

▶선전(鮮展) 17, 18, 19회 입선

▶경성제대 법과 졸업

▶국내 첫 화랑 반도화랑 대표

▶홍익대 교수.대학원장.총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회장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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