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 청소년 10명 중 9명이 여자…여섯 명은 성폭행·성매매 당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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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008년 10월 어느 날 오후. 경기도의 한 학교 운동장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왔다. 운전자 권모(42)씨는 방과후 텅 빈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A양(13)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한데, 차 좌석을 앞쪽으로 밀어줄래?” 고개를 끄덕인 A양이 승합차 안에 들어가자 권씨는 차 도어를 닫은 뒤 근처에 있는 폐가 공터로 차를 몰았다. 이곳에서 권씨는 A양을 성폭행했다. 권씨는 같은 달 또 다른 학교 운동장에서 B양(8)을 똑같은 수법으로 유괴해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경찰에 붙잡힌 권씨는 재판 과정에서 “당시 술에 취해 분별력을 잃었다”고 했으나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씨에게는 징역 7년의 실형과 함께 5년간의 신상정보 공개가 선고됐다.

권씨의 범행은 청소년·아동을 대상으로 한 유괴 범죄의 실상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 청소년 유괴 사건 열 건 중 아홉 건은 여성을 노린 것이고, 여섯 건은 성폭행·성매매 등 성범죄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형사정책연구원 강은영 박사가 전국 16개 검찰청에서 처리된 유괴 사건 피해자 415명을 분석한 결과 청소년(만 13~18세) 피해자의 91.9%가 여성인 것으로 집계됐다. 청소년을 유괴한 목적을 보면 성적인 목적이 39.1%였고 영리 목적이 19.5%로 그 뒤를 이었다. 영리 목적은 성매매 등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간접적인 성범죄에 해당한다.

아동(만 12세 이하) 유괴의 경우 남아 피해자(53.2%)와 여아 피해자(46.8%)의 비율이 비슷했다. 유괴 목적 역시 양육 목적(39.1%)이나 비영리적 개인 목적(16.1%)이 많았다. 유괴된 장소를 보면 아동과 청소년 모두 ‘집 또는 집 주변’이 각각 35.8%, 30.8%로 가장 많았다. 이번 부산의 이모양 납치 살해사건과 98년 안양의 혜진·예슬양 납치 살해사건 모두 집 근처에서 벌어졌다.

그 뒤는 아동의 경우 ‘학교·학원 주변’(25.0%), 청소년은 ‘길거리’(27.5%), ‘PC방·유흥업소’(22.5%) 등에서 유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청소년 유괴는 계획적으로 이뤄지는 비율이 31%에 달했다. 유괴 방법도 환심을 사는 등 비강제적 수법을 쓴 경우(74.8%)가 폭력 등 강제력을 동원한 것(25.2%)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아동성폭력피해가족모임 지원센터 송기운 대표는 “범인이 범행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피임 도구까지 준비하는 등 계획적 성폭행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 유괴의 사건당 피해자 수는 평균 1.52명으로 2명 이상이 한꺼번에 유괴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강 박사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여자 아이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다녀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강 박사는 “청소년 자녀의 경우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런 방심이 범죄 피해를 보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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