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그린피스 공동창설자 故 데이비드 맥타가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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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국제 환경운동단체인 그린피스의 공동창설자인 데이비드 맥타가트가 지난 23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68세.

캐나다 태생인 맥타가트는 이날 이탈리아 중부 페루자 인근의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에서 혼자 자동차를 몰고가다 다른 승용차와 정면 충돌했다. 그는 1995년 건강이 나빠져 은퇴한 뒤 이 지역에서 올리브를 키우며 살아왔다.

맥타가트는 70년대 초 프랑스가 남태평양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하는데 분노해 국제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카리스마적인 지도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해 79년 다양한 성향의 소그룹으로 이뤄진 그린피스를 통합해 의장이 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다소 급진적인 활동으로 "과격하다" 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가 의장으로 있는 동안 그린피스는 핵실험 저지는 물론 핵폐기물의 해양투기와 이동 감시, 고래보호, 남극대륙 자원개발 저지 등 다양한 활동으로 국제환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91년 스스로 의장직을 물러난 뒤에도 그린피스가 급진적인 노선을 계속 유지하도록 한동안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32년 캐나다 서부 밴쿠버에서 태어난 맥타가트는 17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국가대표 배트민턴 선수를 지낸 뒤 건설업체를 운영했다. 69년 자신이 건설한 스키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사고보상금으로 상당액을 날리고 사업에서 손을 뗀 그는 72년 한 캐나다 신문에 난 광고에 의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린피스의 전신인 '물결을 만들게 하지 말라' 는 환경단체가 낸 이 광고는 남태평양 무루로아 환초에서 프랑스가 실시할 예정이던 대기권 핵실험에 항의하기 위해 이 지역으로 항해할 사람을 모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광고를 본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베가' 라는 소형 보트의 이름을 '그린피스 3세' 로 바꾸고 항해에 나섰다.

그는 무루로아에서 닻을 내리고 핵실험 중지를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프랑스의 첫 실험이 연기됐지만 그는 프랑스군에게 쫓겨났다.

그는 1년 뒤 다시 무루로아로 항해했으며 이번에는 프랑스 군인에게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핵실험 예정지에 배를 대고 항의시위를 한 급진적인 환경보호활동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국제환경운동의 중심 인물이 됐다.

캐나다 그린피스의 활동가인 조 듀프레이는 맥타가트를 "대하기는 어렵지만 항상 영감을 준 인물" 이라고 평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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