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납품값 10%선 인하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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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경기도 안산시의 한 자동차부품 업체는 최근 기아자동차 구매담당 간부가 전해준 납품 단가 조정안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단가를 평균 10% 낮춰 지난 1월 납품분부터 소급 적용하자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예년 같으면 가격 인하폭이 3% 안팎이었으나 제품에 따라 최고 11%까지 깎아 달라고 요청해 난감하다" 며 "그렇다고 대기업의 요청을 외면하긴 어려워 나름대로 방안을 찾고 있다" 고 말했다.

기아차 구매팀 관계자는 "협력업체가 제품 설계 변경.공정 개선 등의 원가절감 방안을 제안하는 것을 전제로 적정 수준의 가격인하 협의를 하고 있다" 고 말했다.

국내외 경영 환경이 갈수록 불투명해지면서 원가절감 차원에서 중소 협력업체와 협의해 납품가를 낮추려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기아차.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은 최근 협력업체의 부품.생산설비 등의 가격을 지난해 말보다 10% 안팎 낮추기로 하고 협력업체들과 가격조정 협의에 들어갔다.

협력업체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납품가격을 꾸준히 내린 데다 최근 경영사정이 나빠져 가격 인하에 어려움이 많지만 거래 관계 유지 등을 위해 대기업과 협의를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로부터 납품 가격 인하 협의를 요청받은 한 반도체 장비업체 사장은 "외환위기 때 납품가를 30% 내렸고 이후에도 가격 복원이 안된 상태인데 최근 가격을 10% 더 내려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며 "반도체 장비는 연구개발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 인하 여력이 크지 않아 고민" 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구매담당 관계자는 "독점 납품업체와는 국제시장 가격동향.마진율 등을 감안해 가격조정을 한다" 고 말했다.

인천시에서 플라스틱 가공제품을 만드는 중소 업체는 사내 유보액이 많다는 점을 들어 대기업 계열사인 석유화학 업체들로부터 고통분담 차원에서 가격 인하를 요청받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과 관계자는 "협력업체와 정상적인 협의 과정을 거쳐 가격을 내리는 것은 위법 행위가 아니다" 며 "다만 일방적인 가격인하 조치는 사안에 따라 불공정 거래 조사대상이 될 수 있다" 고 설명했다.

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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