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아리랑을 잊은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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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피란 길, 전장으로 떠나는 친구를 보내며 우리는 아리랑을 불렀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에 잠을 설치곤 했던 암울한 시절.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어두운 운명 같은 것이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노래가 나오지도 않았다.

친구는 떠났고, 그가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넘어가던 그 고갯길, 영화의 한 장면이 아련하다. 독립투사가 일본 형사에게 잡혀 간다. 노모는 실신했고, 고개를 넘어가는 그를 보내며 마을 사람들 입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대항할 수도 없다. 어떤 핍박에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이 절망적 무력감,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건 삭이고, 참고, 기다리고, 그리고 한 맺힌 아리랑을 섧게 부르는 일 뿐이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도 꽤나 오래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피침.핍박.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반도적 운명, 소국가의 민족적 시련의 상징, 우리와 운명을 같이한 노래다.

물론 우리만은 아닌 것 같다. 이웃 대만의 고산족, 일본의 아이누, 멀리 아메리칸 인디언의 연가는 또 얼마나 애절한가. 야윈 양떼를 몰고 그 높은 산마루를 넘어가는 잉카의 후예, 그들이 부르는 앨콘드라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들이 겪어 온 슬픈 역사가 노을 가득히 아려온다. 가난하고 핍박받은 민족은 하나같이 아리랑 같은 애상조의 노래를 부른다. 우린 여기서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흐르는 정서적 공감대를 읽을 수 있다. 대항할 수 없는 무력감 앞에 속절없이 참고, 견디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민족의 정한이 타령처럼 서려 나오는 것이다.

한데 난 이 노래를 헬싱키에서 듣고 적이 놀랐다. 어째 여기서까지□ 잘사는 나라, 스칸디나비아 4국이 아니던가. 그러나 핀란드만은 사정이 달랐다. 주변 강국의 끊임없는 침략, 춥고 긴 겨울, 일년 후 반은 어두운 밤, 피폐한 자연….

그들의 표정이 무겁고 어두운 까닭을 알 것 같다. 그 유명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에도 아리랑의 정서가 담겨 있는 건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자신을 스오미라 부른다. 그 말 속에도 어딘가 아리랑적인 정서가 서려 있다.

아리랑 속에는 이렇듯 약소민족의 비극성이 담겨 있다. 그리고 거기엔 끊어질 듯 면면이 이어져 오는 끈질긴 민족의 저력이 숨어 있다. 우리에게 아리랑마저 없었다면 그 절절한 심경을 어떻게 달랠 수 있었을까.

이제 아리랑은 우리의 민족혼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세계 관광객이 모이는 유명 극장 식당에는 으레 아리랑이 등장한다. 한데 모두들 박수를 치고 흥겨워하다 구성진 아리랑이 나오면 그만 맥 빠진 분위기가 된다. 여행의 흥분에 들뜬 관광객은 신나는 분위기다. 그리고 다른 나라 노래들은 대개가 경쾌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고을마다 아리랑이 있고 신나는 것도 없진 않다. 하지만 아리랑은 역시 우리가 부르는 애상조여야 아리랑스럽다. 그래서일까. 빠르고 역동적인 젊은 세대와는 호흡이 맞지 않는다. 더구나 세계와 함께 약동하는 우리 젊은이는 아리랑을 잊은 지 한참 된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아리랑을 가르쳐야 하더니 이젠 그나마 안 하는 걸까. 우리 시대엔 절로 익혀지는 게 아리랑이었는데.

이젠 어른도 잘 부르지 않으니. 이러다 언젠가 이 땅에서 아리랑이 사라지는 날이 올까. 이로써 아리랑 고개를 넘을 일도 없고 우리의 비극적 운명도 막을 내리는 걸까. 핍박.가난.설움.눈물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날이 오는 걸까.

젊은이의 노래는 숨이 넘어갈 듯 빠르다. 어딜 간다고 그렇게 달려가는 걸까. 표정도 한결 가볍고 밝아서 좋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 불안이 가시지 않는 건 또 무슨 사연일까. '핀란디아' 가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헬싱키 숲 속,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해 본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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