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희망대로' 해석한 장관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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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에서)보낸 것은 타자도 안했더라. 그런 걸로 봐서 공식적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

북한의 돌연한 남북 장관급회담 연기에 관한 정부 고위 당국자의 배경설명 중 나온 말이다. 판문점에서 북한 연락관이 전화로 부르면 우리가 받아 적는 전통문의 기본체계조차 모르는 소리였다. 13일 오전 북한측으로부터 불참통보를 받고 청와대.통일원의 고위 당국자들은 이른 시간 내에 브리핑을 하는 등 성의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답변을 듣는 기자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남북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겁니다" , "유감 전통문을 보냈으니 하루 이틀이 지나면 뭔가 윤곽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 단정적이고 무성의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북한측의 불참조치는 지난해 평양 정상회담 이후 남북 당국대화의 주축이던 장관급회담 채널에 일단 적신호가 왔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에 속한다.

이런 판단은 통일부 등 관계부처 직원들도 대부분 인정한다. 그렇다면 배경설명에 나선 고위 당국자들은 최소한 다각적인 분석을 해보려는 자세는 보였어야 하나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심각한 사태' 로 해석되려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듯이 '희망사항' 위주로 언급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 외교.안보팀은 장차 일어날 수 있는 현실보다는 정책(대북포용) 목표나 희망에 맞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비약일까. 이번 한.미 정상회담 이후 많은 국민은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에 대한 회의' 같은 발언에 불안함과 함께 예민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국면에서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기조를 "아직 부시 외교안보팀이 다 짜여지지 않았다" 고 애써 강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정부의 '대북.외교안보정책호(號)' 란 배는 잘못하면 격랑(激浪)을 만나 휘청거릴 수 있는 처지에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견해다. 승객들은 충돌이나 좌초를 걱정하지만 선장은 안심하라는 말만 하고 있고, 현장의 위험을 제대로 알려야 할 기관장이나 갑판장은 제 목소리를 접었다. 지금은 출범 초기 순항(順航)시절의 뜨거운 가슴보다 냉철한 머리와 판단이 필요한 때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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