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10시간] 유오성 "마흔살까진 연기 지망생일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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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영화배우 유오성(33)은 '친구' (31일 개봉)의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오랜만에 화사한 봄볕이 쏟아진 지난 일요일 서소문 공원에서 만난 그에게 "청승 맞게 웬 울음?" 하고 운을 떼니 "모르겠다. 기쁘다, 슬프다의 차원이 아니다. 죽마고우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고 답했다.

#1 일상인

꼭 2년 전 MBC 일일극 '하나뿐인 당신' 촬영현장에서 유오성을 본 적이 있다. 연예계의 치부를 드러낸 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 에서 가수 매니저로 나오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직후였다.

당시 그는 "연기는 점(點)이 아니라 선(線)" 이라는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순간의 인기로 배우를 재단하면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말도 했었나요. 지금도 같은 생각이에요. 좋든, 나쁘든 작품 하나하나가 그 배우를 결정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마흔이 될 때까진 배우란 말을 쓰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전까진 연기 지망생일뿐이죠. "

겸손하다. 전혀 스타다운 냄새가 없다. 1992년 연극 '핏줄' 로 데뷔한 이래 연극.드라마.영화를 넘다들며 묵묵히 실력을 쌓아온 그의 행적과 닮았다. '비트' (97년), '간첩 리철진' '주유소 습격사건' (99년)을 통해 일급배우로 떠올랐건만 "아직도 건실한 일상인이 되는 게 우선" 이라고 말했다.

#2 설렁탕

유오성은 '친구' 로 자신만의 확실한 영화를 가질 것 같다. '박하사탕' 의 설경구가 그랬듯이 그는 '친구' 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간첩 리철진' 에 이어 두번째 주연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94년) '닥터 봉' (95년) '쁘와종' (96년)등에서 단역(이때까지 주업은 연극)으로 나왔던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 독기가 이글거리는가 하면, 주변 친구들을 감싸안는 부분에선 맏형 같은 듬직함이 발산한다.

"사실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드라마와 동시에 찍느라 제 자신으로선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반응은 대단했지요. 약간의 사회성이 가미된 작품이었지만 때리고, 부수는 영화에 사람들이 그렇게 몰릴 줄 몰랐습니다. 관객이란 걸 다시 한번 생각했죠. 이후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 영화엔 절대 나가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

허기가 느껴졌다. 대학로로 발길을 돌려 설렁탕 집을 찾았다. 유오성은 주인 아주머니를 보고는 "어머니" 하며 반갑게 인사한다.

"연극할 때 단골로 드나들던 집입니다. 지금도 약속은 거의 이곳에서 하죠. 후배들은 이제 사정이 좋아졌으니 '돈 좀 써라' 고 하지만 가난했지만 치열했던 연극정신을 잊을 순 없죠. "

#3 나무

유오성은 영화란 큰 나무를 보고 난 후의 느낌처럼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두 발이 딛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애정을 망각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사회정의 같은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이 치열한 각박한 일상에 따뜻함을 선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

12일 시사회장에 재회한 그는 '얼굴에 분을 칠한' 배우들의 책임과 임무는 관객들에게 삶의 에너지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앞으론 사회성이 있는 영화를 고집할 겁니다. 영화가 웃고 즐기는 데서 끝나면 곤란하죠. "

"영화를 사회변혁의 무기로 여기는 것이냐" 고 묻자 "그런 것은 아니다. 활자로선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 사는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의미다" 고 응답했다. 때문에 개인적으론 사랑타령 일색의 멜로영화, 액션.특수효과 등에 돈만 쏟아부은 대작을 기피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11개월된 아들이 갑작스런 고열로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일어섰다. "아빠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네요(웃음). 다음 작품에선 형사로 나옵니다. 건달로 자주 나왔던 제가 공무원이 된다니…. 그런게 배우겠죠. "

글〓박정호,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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