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중국의 ‘회색 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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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2년을 살았으니 어엿한 도시민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 희망 없는 도시생활에 지쳤습니다.”

리궈페이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후커우(戶口·호적)’가 문제였다. 그는 농촌 후커우를 갖고 있기에 도시 보험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차별은 자식에게도 ‘세습’된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본지인(本地人)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하는 학교에 취학할 수 없었고, ‘찬조금’을 낸 후에야 입학할 수 있었다. ‘도시에 와 일은 해라. 그러나 너희 농민들과는 성장 혜택을 나눌 수는 없다’는 식이다. 그게 약 1억6000만 농민공(農民工·농촌 출신 도시 근로자)이 처한 현실이다. 1950년대 말 이농현상을 막기 위해 도입된 후커우 제도가 산업화시대 도시 기득권층의 이기주의와 맞물리면서 사회를 더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리궈페이는 그래도 현실을 인정하는 편이다. 농민공의 70% 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20~30대 ‘신세대 농민공’들은 아예 도시 진입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광둥성 둥관(東莞)의 의류업체에서 일하던 왕어(王娥·22)는 이번 설 명절을 쇤 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3년 일해보니 농촌 후커우로는 도시에서 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고향 후난(湖南)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민을 농민과 도시인으로 양분하고, 농민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기존 질서를 거부한 셈이다.

이는 ‘민공황(民工荒·노동력 부족)’ 현상으로 이어진다. 왕어가 일하는 회사 근로자 7000명 중 2000여 명이 복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광둥 지역에서만 200만 명의 노동자가 부족한 실정이다. 일손이 없어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다.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세계공장’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국 경제 전문가들은 ‘도시민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자칫 세계공장이 멈출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주요 언론들도 요즘 후커우 제도 철폐를 집중 거론한다. 원자바오 총리도 전인대 보고에서 제도개선을 약속했다. 이 흐름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마오쩌둥 시기부터 이어져온 ‘농민은 농촌에만 머물러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또 다른 사회혁명이 시작됐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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