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소방관이 될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서울 홍제동과 부산 연산동 화재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소방관들과 그들의 가족 친지들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을 때 신문 다른 쪽에는 동생을 죽인 미친 중학생의 횡설수설이 보도됐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기도 한 어린 학생의 말이지만 우리를 겁나게 한다.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기 위해서" 또는 "청부살인업자가 되기 위해서" 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여기서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과 남을 죽이기 위한 삶이 크게 대비된다. "나는 지금 남과 나를 살리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직접적으로 물과 불 속에 뛰어들어 구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라도 남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남을 살리는 것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저 중학생의 정신상태에 직간접의 영양분을 주는 일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심심해 하면서 남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싶어하고, 액션 영화류의 주인공을 멋지게 여긴다면 직접 폭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잠재적 동조자 내지 방관자가 된다.

***마음다짐 해도 깨달음 얻어

물론 세상사 어느 하나 남을 살리는 일과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다. 농부는 곡식을 만들어 우리를 먹여 살린다. 석가가 농부들이 일하는 밭 옆을 지나게 되었다. 한 농부가 석가에게 물었다. "우리는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데 부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석가는 "나는 마음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고 답했다. 이렇게 보면 식당.공장.사무실에서 일하는 이들 누구 하나 살리는 일에 관여되지 않는 이가 없다.

어린이 지도를 하는 비구니 스님이 "환경미화원은 남이 더럽혀 놓은 곳을 청소하므로 아주 훌륭한 분이야" 라고 말했다. 그 뒤에 "너희들은 커서 무엇이 될래" 라고 물었더니 일제히 "환경미화원이 될래요" 라고 대답했다.

***여유있을 때만 남을 위하나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이 어떤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택하겠다면 흡족해 할 것이다. 물론 그 직업을 얻어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라고 이르기는 하지만 남을 살리는 일의 우선순위는 밑으로 떨어진다.

자신이 먼저 잘 되고, 여유가 있을 때 남도 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일 뿐이다. 그와 같은 부모들의 바람 속에서 자란 자녀들은 위를 향해 뛸 수밖에 없다. 남을 살리기는 싫고 죽이기만 좋아서가 아니라 이기기 위해 남을 치는 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더라도 생일이 늦으면 학교에 가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 다음 해에 학교에 보낸다는 보도가 있었다. 부모들은 왕따를 피하게 하려는 생각만 하고, 적극적으로 자식들에게 왕따를 만드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목숨을 걸고 남을 위하고 살리는 일을 하는 소방관 같은 이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염불처럼 외워 보라.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게 된다. 우리 어린이들에게서도 "소방관이 될래요"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게 되리라.

불경은 석가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받은 이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본 사람들까지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설한다. 좋은 일을 찬탄하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하리라고 원을 세우는 것이 되고, 남도 같이 마음을 내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효과를 낸다.

또 육체나 정신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보거나 듣거나, 글과 말로 전하면 그 공덕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희생된 소방관들은 국민으로 하여금 큰 복을 짓게 했다. 국민 모두가 소방관들의 어려움을 알아보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나도 복을 쌓기 위해 뒤늦게 이 글을 덧붙인다.

아무나 소방관이 될 수는 없다. 건강과 봉사정신과 직무에 필요한 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방관의 마음가짐으로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힘껏 남을 구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