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기 불지피기 엔화 유도설 모락모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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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1백20엔대에 들어선 것은 일본이 경기부양책으로 '엔저(低) 카드' 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하야미 일본은행 총재는 7일의 한 강연에서 경기부양과 관련, "외환시장에 개입해 큰 폭의 엔저를 유도하는 정책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고 말했다. 나중에는 인위적인 엔저가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마무리했지만 이 한 마디로 엔화는 약세로 돌아섰다.

일은은 8일 엔화 약세 용인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지만 경기부양을 위한 금융정책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환율정책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시장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일은은 올들어 금리를 두차례나 낮추면서 여유있는 통화공급을 계속해왔다. 그래도 돈은 은행에 머문 채 기업으로 흘러가지 않아 경기부양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유동성은 풍부하지만 기업의 도산위험 때문에 신용 경색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일은은 엔저 유도라는 환율정책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엔화가치 하락은 일본의 수출을 촉진해 경기회복에 도움을 줄 것이다. 또 일본으로 들어오는 수입상품의 가격상승으로 물가하락에 의한 디플레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주가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엔저에 따른 추가하락은 고려대상이 못된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들은 엔저가 경기부양의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엔화가치만 낮춘다고 경기가 쉽게 부양되지는 않는다는 시각도 많다. 우선 수출의 경우 미국.아시아의 경기위축으로 수입수요 자체가 감소하고 있으므로 엔저에 의한 수출촉진에는 한계가 있다. 또 일본의 수출이 다소 늘더라도 엔저는 아시아 경제에 큰 부담을 줘 장기적으로 일본에도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수입물가 상승에 의존해 국내물가 하락을 막자는 발상도 별로 먹혀들지 않을 듯하다. 유통혁명이 거세게 불고 있어 일본의 고물가는 수입물가와 무관하게 더 떨어질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위적인 엔저는 일본정부의 구조조정 정책과도 배치된다. 하야미 총재 스스로도 같은 강연에서 앞부분에는 엔저를 시사하고 뒷부분에는 구조조정을 촉구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처럼 환율정책을 포함해 일본이 총동원하고 있는 경기부양책들 사이에는 내부충돌이 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엔화가치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다. 자칫하면 일본의 실익없는 어설픈 경기부양책이 한국 등 아시아의 경제에 부담을 안겨줄 위험마저 있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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