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러시아 ABM합의는 '안일한 외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ABM-NMD' 파동은 급변하는 국제안보 정세에 대한 외교 당국의 '안일한 자세' 가 빚어낸 것이라는 게 정부 안팎의 평가다.

◇ "별일 없을 것" =외교통상부의 한 당국자는 "러시아측은 공동성명 초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NMD 문제를 넣자고 제안했으나 우리측이 반대했다" 면서 "그러자 러시아는 대신 'ABM 조약 유지' 를 넣자고 제안해 받아들였다" 고 밝혔다.

그러자 외교부 일각에서는 "부시 행정부는 ABM 조약을 개정하거나 파기해서라도 NMD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며 문구 삭제를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 출범으로 국제정세가 바뀐 데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맹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마당에 미국의 오해를 사지 말자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공동성명 작성 주무부서 등이 "공동성명을 고칠 시간이 없는 데다 지난해 4월 핵확산금지조약(NPT)평가회의와 지난해 7월 오키나와 G-8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에도 똑같은 문구가 들어가 있다" 며 반대해 그대로 통과된 것이다.

한 당국자는 "2000년 4월, 7월, 9월 등에 잇따라 나온 ABM 관련 문안은 미국과 러시아가 절충한 문서로 양측의 의견이 절충된 것인 만큼 이를 원용한 것은 문제될 것 없다" 고 말했다. 즉 보존.강화(preserve and strengthen) 가운데 '보존' 은 러시아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지만 '강화' 라는 용어는 '전략적 상황을 고려해 이 조약을 변화시킨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 "한국 의도 무엇인가" =외교부측은 ABM 관련 한.러 공동성명 내용을 미측과 협의했다고 밝혔으나, 미국은 우리 정부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여러 채널을 통해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겉으로는 덤덤해 했으나 내심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일부 국회의원들이 'NMD 중지촉구 결의안' 제출 움직임을 보이는가 하면, 천용택(千容宅) 국회 국방위원장의 NMD 반대 발언이 나온 와중에 한국 정부가 이런 조항을 채택한 데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

외교 소식통은 "한국이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해 미국이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다" 면서 "특히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유력인사들이 '반(反)NMD' 입장을 보이는 것을 예사롭게 보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이철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