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평양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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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반복되면 이변이 아니라는 말이 옳다면 한국 시간으로 다음주 수요일 아침이면 앞으로 4년간 미국을 이끌어갈 차기 대통령의 향배가 결판난다. 워낙 박빙의 싸움이다 보니 2000년 대선의 소설 같은 혼돈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만 그런 이변은 비(非)미국인 입장에서도 몹시 혼란스러운 일이므로 그 가능성은 일단 젖혀놓자.

조지 W 부시와 존 케리 중 누가 되더라도 차기 백악관 주인이 당면하게 될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이라크 문제가 될 것이다. 당장 내년 1월 이라크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케리가 당선될 경우에도 형식상 내년 1월 말까지는 부시의 몫이지만 힘 빠진 부시에게 기대할 역할은 없다. 따라서 케리의 당선이 확인되는 순간부터 이라크 문제를 비롯한 대외정책의 주도권은 사실상 부시의 손을 떠나게 된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과 이란 핵 문제가 될 것이라는 데 워싱턴 국제관계 전문가들의 전망이 일치하고 있다. 선거운동 기간을 통해 특히 북한 핵 문제는 차기 미 행정부의'발등의 불'로 떠올랐다. 케리는 부시와의 TV 토론에서 부시가 이라크에 온통 정신이 팔려 실체적이고 심각한 위험인 북한 핵 문제를 방치했다고 몰아붙임으로써 이를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 모두 공개적으로 북한 핵 위협의 신속한 제거 필요성에 동의한 만큼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한.중.일 3국을 순방 중이다.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의견 조율이 주목적이라고 일부 미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의 고별 방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재선에 대비해 부시가 마련한 2기 내각 명단에서 파월이 빠져 있다는 건 이미 한참 된 이야기다.

행정부 내 강온파가 첨예하게 대립한 북한 핵 문제에서 파월은 그나마 비둘기파 쪽에 서서 균형을 잡아왔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해 유력한 관측대로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이 파월의 뒤를 잇게 될 경우 대외정책의 좌장으로 강경파를 대표해온 딕 체니 부통령의 입김이 더욱 세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북한의 태도에 의미있는 변화가 없는 한 핵 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의 장래는 낙관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부시가 재선될 경우 내년 여름을 전후해 한반도에 워싱턴발'핵폭풍'이 몰아칠 거라는 성급한 관측도 나오고 있다. 유엔 경제제재, 고사(枯死), 정권교체 유도 등 섬뜩한 용어들이 미 언론을 장식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평양이 케리의 당선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케리는 북.미 양자협상을 통한 핵 문제의'빅딜'을 공약해 왔다. 핵 문제만이 아니라 재래식 병력과 주한미군 감축, 북한 인권 개선, 평화협정 체결 등 모든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대타결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하지만 협상이 실패할 경우 군사적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평양의 본심이 협상에 있다면 케리의 당선은 북한으로서 분명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핵무기 보유가 북한의 진심이라면 케리의 당선에서 북한이 기대할 것은 없다.

핵을 지렛대로 미국을 움직인다는 북한의 20년 전략은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허점과 모순을 최대한 활용해 미국을 농락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제 계산을 끝낼 시점이 됐다.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무력한 수 싸움을 계속하기는 힘들게 돼 있다. 남은 것은 평양의 선택이다.

배명복 순회특파원 <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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