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미국의 양심 일깨운 원칙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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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원칙주의자(A Man of Principle)' .

지난 19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폐렴으로 인해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영화감독 겸 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에 대한 영국 BBC 방송의 표현이다.

장년층 영화팬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67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영화는 유능한 흑인 의사(시드니 포이티어)와 쾌활한 백인 처녀(캐서린 휴튼)의 결혼을 둘러싼 양쪽 집안의 갈등을 다뤘다.

영화 '흑과 백' (58년)에서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들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인종차별 문제를 선구자적으로 다뤄 미국 사회의 잠들어 있는 양심을 자극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빗길에서 사고가 난 죄인 호송차를 탈출한 백인(토니 커티스)과 흑인(시드니 포이티어)의 얘기를 통해 뿌리깊은 미국의 흑백 차별문제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크레이머 감독은 '할리우드의 양심' 으로 불렸다. 그는 전성기였던 50~60년대에 제작자.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미국 사회의 인습.편견 등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그가 제작한 서부영화의 고전 '하이눈' (프레드 진네만 감독.50년)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을 습격한 악당 총잡이에게 혼자 의연하게 맞서 결국 승리하는 보안관의 활약상을 다루면서 그는 겉으론 정의를 강조했지만 실은 당시 미국사회의 거센 반(反)공산주의 열풍(매카시즘을 꼬집었다.

또 영화 '그날이 오면' (59년)에서 핵 확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뉘른베르크의 재판' (61년)에서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는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파고 들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에 대한 열정, 세상의 양심에 던진 충격 등으로 볼 때 그는 위대한 영화인이었다" 고 말했다.

"예술성이 떨어진다" "다소 관습적이다" 는 일부 비판도 있지만, 그는 영화 경력 30여년 동안 35편의 작품을 만들어 오스카상에 85번 지명됐고 15번을 수상했다. 그 작품들을 통해 커크 더글라스.말론 브란도.게리 쿠퍼 등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뉴욕 빈민가 출신인 그는 그러나 97년 펴낸 자서전에서 "그동안 만든 영화가 한 번도 나의 꿈에 접근하지 못했다" 고 회고했다. 영화는 사회를 개조하는 일종의 '무기' 라고 생각했던 그가 꿈을 이루기엔 세상 자체가 크게 달라진 때문이 아니겠는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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