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영화 질주] '빌리 엘리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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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몇 달 전 예술의전당에서 ‘스텀프’라는 공연을 보았다. 플라스틱 솔 단 하나로 시작되는 공연은 일상의 모든 소리에서 리듬과 춤을 이끌어내며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그런데 하찮은 소음조차 음악으로 바꾸는 동체는 다름 아닌 우리의 몸이었다.

‘빌리 엘리어트’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아무리 험한 가시를 숨겨 놓아도 소년은 춤추기를 멈추지 않는다.

1984년 영국의 총파업 시기. 평생 탄광촌을 나간 적이 없는 빌리네 마을사람에게 춤이란 사치이며, 여자의 취미이며, 런던으로 상징되는 귀족의 전유물로 치부된다.

그러나 빌리에게 춤이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리듬이며, 어머니가 부재한 현실에서 미래로 비상하는 날개다.

빌리는 아일랜드식 벽돌담 위에서도, 담배연기가 뿌연 동네체육관에서도, 술이 취해 잔뜩 화가 난 아버지 앞에서도 춤을 춘다. 두터운 아스팔트를 뚫고 자기 안을 모든 것을 꽃피우려는 한송이 들꽃처럼.

연극무대 출신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대처리즘에 저항해 파업을 벌이는 광부들의 맨주먹과 어린 빌리의 춤을 교차편집으로 대비시킨다. 칫솔질 하는 아버지의 몸짓에서도, 경찰에게 쫓기는 형의 잰걸음에서도 리듬은 살아있다.

자본가에 항거하는 아버지의 맨주먹과 사회적 성관습에 저항하는 빌리의 맨발은 결국 동일한 삶에서 튀어나오는 힘겨운 몸짓이 아닐까? 감독은 켄 로치적인 드라마에 일상 속에 내재한 리듬을 얹어내며, 뇌쇄적 동작으로 스트립쇼를 벌이는 할리우드 영화와 격이 다른 춤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을 보려는 빌리를 위해, 파업마저 포기한 아버지의 울음은 빌리의 춤에 활화산 같은 감동을 실어준다. 평생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던 늙은 광부는 달걀 세례의 수모를 견뎌내며 소리지른다. “우리는 탄광촌에서 썩을 지 모르지만 빌리는 달라. 그 아이에게는 기회가 있다구…”

'빌리 엘리어트' 는 경직된 대처리즘을 비판하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리듬을 접수한다. 춤과 음악과 드라마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빌리는 언젠가 전설 속의 백조처럼 광활한 발레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왜냐면 그는 오직 춤만 생각하고, 꿈꾸는 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는 빌리의 몸짓 위로 흐르는 영국 글램 록의 대표곡 ‘Comic dancer’도 좋다.

영화를 보고 나면 펄쩍펄쩍 샘솟는 빌리의 춤사위와 침대 위에서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의 몸짓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발견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꿈을 꾸는 자 날으라. 약동하는 우주의 리듬에 맞춰, 영원히!!

심영섭<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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