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김수근 대성그룹 명예회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지난 20일 오후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수근(金壽根)대성그룹 명예회장은 연탄사업에서 출발해 석유판매.도시가스 공급.해외유전 개발.열병합발전 등으로 에너지 사업을 다각화한 한국 에너지 산업의 산 증인이다.

고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연탄배달 리어카를 끈 것이 인연이 돼 1947년 대성산업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연탄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70년대 초반 대성을 10대 그룹 반열에 올렸고, 지금은 재계 랭킹 30위권의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고인의 생활은 늘 소박했다. 자신이 입었던 양복을 종종 임직원에게 물려주며 검소한 생활을 당부했고 출장경비가 남으면 회사에 고스란히 반납하곤 했다.

외국 호텔에 머물 때는 객실에서 쓰고 남은 일회용 비누를 "집에서 면도할 때 쓰면 좋겠다" 며 가방에 넣고 왔다. 사적인 식사모임에선 비빔밥과 칼국수를 즐겼다.

유창순 롯데그룹고문은 "고인은 자신에겐 엄격하면서도 지인들을 대할 땐 늘 소탈한 모습을 보였던 소나무 같은 경영인" 이라며 "과학진흥 사업을 위해 사재를 털기도 했다" 고 회고했다.

이상희 전 내무부 장관은 "대성그룹이 보유한 경북 문경새재 인근 1천여만평의 산지를 관광지역으로 개발하자고 주위에서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고인은 번번이 거절했다" 고 말했다.

"연탄사업을 벌인 것은 황폐화하는 삼림을 보호하자는 뜻도 있었는데 나무를 베면서까지 개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며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6공화국 때는 이 산지가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과징금을 물기도 했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 입구엔 "대성그룹은 청정 산림지역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고자 한다" 는 푯말이 서있다.

고인은 정치권의 변화와 압력에도 초연한 입장을 보였다. 3공 시절에는 정치헌금을 내라는 당시 실력자들의 요청을 거부해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지인들은 "고인은 결코 정치인에게 줄을 대는 일이 없었다" 고 입을 모았다.

이런 이유로 세인들은 고인을 가리켜 '가죽고리' 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신의 사업 이외엔 한눈 팔지 않았고, 분수를 지키며 내실있는 그룹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고인은 또한 지난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기까지 '번 만큼만 투자한다' 는 경영지론을 일관되게 지켰다. 이에 힘입어 현재 주력기업인 대성산업의 부채비율은 65%밖에 안되고 그룹 전체의 평균 부채비율도 1백13%에 불과할 만큼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다.

고인은 지난 연말 건강이 악화되자 삼형제를 불러 '투명경영' 을 유훈으로 남겼다.

"너희들에게 계열사별로 경영권을 나눠 주지만 '내 소유' 란 생각은 버려라. 내가 한창 경영할 때는 정부의 간섭도 심했고 오너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며 경영 민주화를 강조했다.

운명하기 며칠 전 고인은 병상으로 그룹 임직원을 불러 필담 유언을 남겼다. 종이엔 "인생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해야 한다" 고 쓰여 있었다.

고윤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