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민의의 경고를 모르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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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결정문을 읽어 내려가는 헌법재판소장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민의(民意)를 대표하는 '통치권'과 통치권을 감시하는 '헌법재판소'가 대결하는 장면에 숨죽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재량권의 일탈, 남용'이라는 대목에서 민의의 준엄한 경고가 들렸고, '국민이 선택한 정권의 결단은 합헌적'이라는 대목에서 정치권력의 무한한 잠재력을 느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위헌 결정. 절망과 환호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정치라는 기예(技藝)에 대해 법이라는 본질(本質)의 힘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는 두 개의 상반된 느낌이 몰려 왔다. 정치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이 어떤 단단한 포승에 묶일 수 있다는 갑갑함이 하나이고, 개혁조급증을 앓는 정권의 무리한 행보를 제어하는 기제가 어딘가 살아 있었다는 안도감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인식은 이제 자신들의 군사를 모아 도처에서 전선을 만들 것이다.

***탄핵 때보다 더 중대한 위기

위헌 결정으로 인해 현 정권은 탄핵 때보다 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집권세력으로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기득권 세력으로 포위된 서울에 눌러앉아야 한다는 원점 회귀의 허탈함도 문제려니와, 지역연합을 결성해 재집권한다는 2007년 대선 전략에도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다. 연기군을 위시해 충청도민이 겪을 낭패는 고사하고, 대규모 뉴딜사업을 일으켜 건설경기를 회복한다는 경제정책에도 비상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4대 개혁법안에까지 시비의 불똥이 튀면 개혁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이다. 진보정치의 궤도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허탈하기는 국민도 마찬가지다. 수도 이전을 정당화하는 현란한 수사들에 현혹되기도 했고, 반대논리를 설파하는 야당의 논리에 솔깃하기도 했다. 그 어느 것도 좋으니 제발 싸우지만 말라는 온건파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런 아수라장이 '정치', 그것도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개혁정치라는 명분으로 연출되었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은 그것이 적어도 '바른 정치'는 아님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본질을 무시한 정치'에 한없이 애태우고 서로를 헐뜯었단 말인가. 위헌 결정에 실망하거나 좋아할 때가 아니다.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여당과 야당, 그리고 청와대의 정책브레인들에 대해 일대 반성을 촉구해야 한다. 조선시대 같으면, 임금 이하 모든 각료들이 종묘사직에 며칠이고 꿇어앉아 석고대죄했을 일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수습할 일은 산적해 있다. 예상대로 비판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 살인의 날' '입법권 침해' '자의적.정치적 판결'이라는 비난이 터져 나오고, '관습헌법'의 법리해석 시비가 한창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돌아볼 것이 있다. 무엇보다 진보정권의 '정치양식'을 바꿔야 한다. 혁명은 열정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20세기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다. 환경이 성숙하고 여론이 무르익어야 한다. 4대 개혁법안의 정당성을 확신하더라도 어젠다 설정을 포함해 협의와 합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무리 없이 관철하는 정치적 기량(技倆)이 설익은 개혁의지보다 훨씬 더 진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독재정권의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던 경험으로 무엇이든 돌파해낼 수 있다는 습관성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보수 기득권 세력이 너무나 완강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습관성 자신감 과감히 버려야

역사적 정통성 위에 홀로 서 있다는 그 배타적 경계의식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쟁점을 촉발하고, 피아(彼我)를 경계짓고, 아군(我軍)을 호명하는 '적의(敵意)의 리더십'으로는 개혁정치의 발전적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도 있다는 이 중대한 개혁문법을 깨달아야 한다. 한없이 야속한 헌재의 결정은 진보정치의 앞날에 쓰지만 소중한 약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보수세력에게 면책사유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수도 이전이라는 비책을 쓰게 할 만큼 다그친 궁극적 책임은 보수에게 있다. 누적된 불균형을 수정하려는 진보정치의 눈물겨운 노력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구태로는 집권의 꿈은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는 어쨌거나 진보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마당에 진취적 대안을 한번도 내놓은 적 없는 보수세력이 위헌 결정을 축하하는 승리의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더 없는 비극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