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한건주의식 남북교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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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만난 이후 문화.경제교류의 봇물이 터지면서 지방자치단체들도 뒤질세라 북한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남원시와 춘향문화선양회가 지난 1일 평양 봉화극장에서 창극 '춘향전' 을 공연했다.

문화분야 교류에서 제법 규모가 큰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당초 기대대로 진행되지 못해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이 공연은 총 8막 가운데 1~4막은 남원 춘향예술단이, 나머지 5~8막은 북한측이 하는 등 남북 합동공연으로 계획됐었다.

한 작품을 남.북한 예술인들이 함께 공연키로 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관심이 많이 쏠렸다. 남원시는 이 행사에 8천여만원을 썼고 공연 대가로 북한에 1백만달러를 지급하는 등 비용면에서도 '큰 이벤트' 였다.

그러나 예술단이 북한에 도착해 공연을 불과 하루 앞둔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측이 합동공연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통보해온 것이다.

춘향예술단은 당초 북한측이 하기로 한 5~8막분을 부랴부랴 연습해 무대에 올라야 했다.

준비해간 장비도 부족해 무대 배경을 제대로 꾸미지 못했다고 한다.

극 후반 '암행어사 출두' 부분에서는 우리측 예술단원들만으로는 인원이 모자라 북한측 공연자들을 투입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공연의 질이 어떠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충분한 사전준비와 철저한 협의도 없이 한건주의식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다 큰 낭패를 본 것이다.

이에 대해 춘향문화선양회 안한수 회장은 "춘향전이 우리는 창극이고 북한은 가극으로 양식이 서로 달라 각자 공연할 수밖에 없었다" 고 말했다.

그는 또 "공연을 계약할 때 북한측 아태위원회와 우리측 관계자 모두가 예술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같은 문제가 생겼다" 고 해명했다.

문화계에서는 "엄청난 돈을 퍼주고도 북한측에 끌려 다니며 졸속으로 공연한 것은 북한과 교류라는 명분에 사로잡힌 일부 인사들의 공명심 때문" 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

진정한 남북교류와 협력을 원한다면 한건주의 발상은 버려야 한다. 문화는 문화답게, 경제는 경제답게 공감과 교류를 이루는 장이 돼야지, 다른의도가 담겨서는 곤란하다.

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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