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하병준] 칠보시(七步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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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정말 와 닿는 요즘이다. 2등, 3등은 의미도 없는, 1등을 위해서라면 '물보다 진한' 혈육의 정도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세상. 1등을 위해 함께 피땀을 흘린 동료도 돌아보지 않는 세상. 하지만 그 누구에게 함부로 비난의 화살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위왕(魏王) 조조(曹操)는 재능이 뛰어난 셋째 조비(曹丕)와 다섯째 조식(曹植) 중에서 조비를 차기 후계자로 낙점한다. 1인자가 되지 못했을 때 황족이든 왕족이든 형제 자매는 잠재적 위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라고 봤을 때 강력한 경쟁자이기까지 했던 조식을 조비가 살려둘 리 만무했다. 역시나 조비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식을 처단하기로 하고 그를 불렀다. 홀로 조비의 궁으로 온 조식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용서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다. 비록 냉혈한 후계경쟁을 거쳤지만 조비도 사람인지라 피를 섞은 아우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것은 당연한 일. 결국 한가지 조건을 내거니 문재(文才)가 뛰어남에 기대어 자신에게 대든 것이 괘씸하니 형제를 주제로 "일곱 걸음" 전에 시 한 수를 지어낸다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걸음을 세고 조식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를 읊기 시작했다.

煮豆持作梗,漉菽以為汁。
(콩을 삶으니 국물이 나오네)
萁在釜下燃,豆在釜中泣。
(콩줄기로 불을 떼니 솥의 콩 알맹이가 눈물 흘리구나)
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
(어차피 한 뿌리에서 났건만 어찌 이리 볶아대느냐)

형제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벼랑 끝 죽음으로 내모는 조비. 그 조비의 악랄함(?)을 눈물의 인간애로 포장해 완곡하게 꾸짖는 조식.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끼리 어찌 이리도 못 살게 구느냐"는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린 조비는 결국 조식을 살려주게 된다.
갑자기 칠보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우리에게 금메달 소식을 안겨 준 남자 쇼트트랙 1,500m에서 금, 은, 동을 모두 휩쓸 수 있던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1위에 대한 강한 열정 때문에 날려버린 이호석 선수에게 많은 비난과 질타가 쏟아지고 있어서이다.
물론 따끔한 질책을 피할 수는 없다. 4년 피땀의 결실을 금메달로 승화시키려는 선수의 승부욕과 열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어찌 "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어차피 대한민국 한 팀이거늘, 그리 모질게 파고 들었단 말인가)"했는지...
하지만 금메달이 없으면 선수생활 자체가 평가절하되는 한국 체육계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과도한 승부욕을 내세운 이호석 선수를 매섭게 질타하는 국내 팬들도 어찌 "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어차피 대한 건아이거늘, 그리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신지...
지금은 사납게 매질을 하기보다는 세계 강호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기를 북돋아 줄 필요가 있다.
"질책의 장작을 태워봐야(萁在釜下燃)", 선수들은 이역만리 땅에서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음(豆在釜中泣)" 이다. 누구보다 괴로워할 사람은 선수 본인이지 않겠나.
국민들의 성원과 선수들이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하병준 중국어 통번역, 강의 프리랜서 bjha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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