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불가피한 제도의 올바른 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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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시행되고 있는 산업은행의 회사채 신속 인수 방안에 대해 반(反)시장적 조치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또 부실기업의 생명을 연장시켜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문제를 1년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방안은 반시장적 조치가 아니라고 본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대규모로 발행된 회사채가 올해 중 만기 도래하고 있으나 투신사.은행신탁 등이 이를 사주지 못하고 서울보증보험 등의 신용보증 기관의 기능이 위축되면서 자금중개시장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A급 회사가 아니면 돈을 빌릴 길이 없고 금융기관들은 개인 대출과 국공채 사들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지금의 고비만 넘기면 회생할 수 있는 기업들이 많이 있는 데도 시장은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의 현 상황은 3년 전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하다. 당시 총 외채규모는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가 많아 결국 나라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었다.

외국 금융기관들은 우리 경제를 진단한 뒤 약 2백20억달러의 단기외채를 만기가 1~3년인 채무로 바꿔줬다. 만일 그 때 만기연장이 안됐다면 지금의 우리 경제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단기적으로 자금이 부족해 부도 위기에 몰리고 있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회생할 가능성이 큰 기업들의 경우 강력한 구조조정을 전제로 도와줘야 한다.

그러나 자금중개시장 자체가 제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 맡기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시장의 실패를 어느 정도 보완하는 것이 회사채 신속 인수 방안이다.

최근 동아건설.우방.한양과 일부 종금사가 퇴출된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회생 가능성이 없는 부실기업은 퇴출될 것이다.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부실기업을 살리자는 게 아니다. 퇴출되지 않아야 할 기업이지만 금융시장 경색으로 어려움에 처한 기업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이 제도가 발표되자 일부에선 산업은행보다는 민간이 중심이 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그 방안은 어떤 형태가 되더라도 성공하기 힘들다. 현 상황에서 민간은 BBB급 이하의 채권을 사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시행된 채권안정기금도 A급 회사채 매입에 치중했음을 상기하면 알 수 있다.

이번 제도는 구조조정을 촉진할 것으로 본다. 과거의 채권안정기금과는 달리 회사채를 사주는 산업은행과 주채권은행들이 대상 기업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노력이 미흡할 것으로 보이는 기업은 신속인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지연되지 않고 오히려 촉진될 것이다.

이 제도는 1년 동안만 만기를 연장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1년 뒤 다시 산업은행이 회사채를 인수해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 회사채 만기도래 금액의 20%는 상환해야 할 뿐만 아니라 1년 동안 만족할 만한 구조조정을 기대할 수 없는 기업들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은 1년간 피나는 구조조정 노력을 해야 하고 그 결과 늦어도 1년 뒤엔 신용등급의 상향조정으로 시장 차입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산업은행이나 신용보증기금의 부실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제도를 통해 상당수의 BBB급 이하 기업들의 경영이 안정되면 회사채 시장도 점차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운영이 제대로 되면 살 수 있는 기업을 확실히 살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재정경제부 이종구 금융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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