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개운찮은 '자율' 구조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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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합병.매각 등 구조조정 작업은 은밀하게 끈기를 갖고 진행해야 성사된다. 자율에 맡긴다면서 정부가 왜 나서나. " 지난달 31일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과 석유화학 등 7개 업종 단체장이 만나 '업계 자율의 구조조정' 에 합의했지만 업계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업계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원칙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부가 과거 빅딜처럼 대상 업종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특정 업체를 죽이고 살리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7개 업종 중 상당수는 왜 대상에 들어갔는지 선뜻 이해가 안가는 측면도 있다. 농기계 업종의 5개 대기업은 최근 수년 동안 모두 이익을 내며 정상적인 영업을 해왔다.

중복.과잉투자 문제가 있지만 산자부 구상대로 업체 수를 줄이고 특정 품목을 전문 생산하는 체제로 간다면 오히려 독과점의 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시멘트의 경우 현재의 공급과잉은 IMF체제 이후 건설경기 침체에 따른 것이어서 건설 경璲?1997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면 문제될 게 없다고 업계는 주장한다.

면방업계는 한술 더 떠 국내 시장의 절반을 수입품에 내준 만큼 오히려 설비를 늘려야 할 형편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산자부는 이들 업종은 당장 문제가 없더라도 업계 내부 사정과 세계 시장 여건을 고려할 때 그대로 두면 곧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또 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업계가 밑그림을 그려서 할 일이지, 미리 짜놓고 끼워맞추기식으로 할 의도는 없다고 강조한다.

신국환 장관도 "구조조정은 업계 스스로 하는 것이며, 정부는 업계가 경쟁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겠다" 고 누누이 밝혀왔다.

하지만 업계의 불신의 벽은 높다. 한 시멘트 업체 관계자는 "과거 빅딜 때도 '업계 자율' 을 내세웠지만 지켜졌나. 가만 놔둬도 업체가 살려면 알아서 할텐데 굳이 업종을 지목한 것은 '건수 올리기식' 발상" 이라고 지적했다.

산자부는 '구조조정을 두려워하는 일부 부실업체가 불만의 목소리를 낸다' 고 주장하지만 이에 앞서 왜 이런 비판이 나오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자율' 원칙을 철저히 지켜 후유증과 잡음을 막아야 할 것이다.

차진용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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