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 노숙자에 '제2출생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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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고 치는 사람이나 잡아넣을 일이지, 왜 생돈 들여가며 노숙자 때문에 고생만 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때가 가장 답답했습니다."

서울 문래동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노숙자 쉼터인 자유의 집에 파견돼 있는 서울 동대문경찰서 소속 최영근(51.사진)경사.

그가 자유의 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 1월이다. 당시 서울시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일대 노숙자들을 자유의 집으로 수용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에 기동대 1개 중대의 상주를 요청했다.

마침 노숙자대책반에서 일하고 있던 崔경사는 "그들을 범죄인처럼 다루면 다시 거리로 뛰쳐나가 버린다" 며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나섰다.

그같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는 대책반에 발령받은 직후인 98년 석달간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이 힘이 됐다.

"초창기 자유의 집엔 영등포파니 종로파니 하며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울역.서소문공원의 '동료' 들이 저를 알아보면서 말이 통하기 시작했죠. "

노숙자들이 따르자 崔경사는 그동안 해오던 무적자의 주민등록 복원사업을 본격화했다. 당시만 해도 지방에선 '노숙자' '무적자' 란 말조차 생소했다.

이 때문에 주민등록 말소지가 시골인 이들을 위해 손수 확인서를 써서 우편으로 신청해주고 지방 출장도 숱하게 다녔다.

이런 崔경사의 도움으로 주민등록을 되찾은 사람은 3년여 사이 2백60여명. 그의 가방 속에는 지금도 주민등록 복원에 필요한 서류 양식과 자신이 서명한 확인서 수십장이 있다.

지난해 영등포서에서 동대문서로 전근했다. 주변에선 그만큼 고생했으니 '잘됐다' 고 축하했다. 그러나 자유의 집 노숙자들이 놓아주지를 않았다.

'崔경사가 아니면 안된다' 는 성화 때문에 동대문서가 영등포서로 그를 파견하는 '편법' 을 동원했다.

그로서는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같은 노숙자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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