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전망대]총통 세뱃돈 6㎞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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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가 수반이 새해 첫날 국민들에게 세뱃돈을 나눠주는 나라가 있을까?"

없을 것 같지만 있다. 대만과 홍콩이 그렇다.

우선 대만을 보자. 춘절(春節.설날)인 지난 24일 오전 9시, 대만 남부 타이난(臺南)현 관톈(官田)향 시좡(西庄)촌. 대만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의 고향인 이곳엔 긴 줄이 늘어섰다.

陳총통의 종가집 대문에서부터 늘어선 행렬은 물경 6㎞.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 새해 첫날 총통이 나눠주는 '리스(利是)' 를 받기 위한 행렬이다.

리스란 새해에 아랫사람,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세뱃돈이다.여기에는 지난 한해의 노고를 위로하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루 위 괘종시계가 정확히 아홉번 울리자 흰 셔츠차림의 陳총통이 마당으로 내려와 훙바오(紅包.붉은 봉투)에 든 리스를 건넸다.

"새 세기에 복많이 받으세요(新世紀, 好福氣)" 라는 금색 글씨가 씌어진 훙바오 안에는 2백대만달러(약 8천원)가 들어 있었다.

陳총통이 준비한 1만5천개의 훙바오는 불과 두시간 만에 동이 났다. 주민들은 리스를 받기 위해 길게는 21시간 동안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총통의 리스는 돈 8천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총통 친필이 새겨진 훙바오는 '재복 효과' 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웃돈이 붙은 채 거래된다.

올해의 경우 맨 처음 건네진 훙바오에는 이미 1천대만달러 이상의 '프리미엄' 이 붙었다.

반면 홍콩은 실리보다 상징 쪽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둥젠화(董建華)행정장관이 24일 양로원 노인들에게 건낸 훙바오는 돈이 들어 있지 않은 '무전(無錢) 리스' 였다. 대신 노인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이 담겨 있었다.

도널드 창(曾蔭權)홍콩 재정사장도 재물신.건강신 황다셴(黃大仙)을 모신 사당에서 뽑은 부적을 '리스' 로 내놨다.

부적에는 "소동파가 가을밤 적벽에서 노닐제 희귀한 농어 네마리를 잡았네" 란 구절이 씌어 있었다. 농어는 가을에야 살이 붙는 물고기다.

점술사들은 이를 "홍콩 경제가 가을이 지나 다시 융성해질 운세" 라고 풀었다. 재무장관다운 리스를 고른 셈이다.

진세근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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