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쓴 중세 일본인들의 삶 '도연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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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재산을 남기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할 일이 아니다. 유산을 너무 많이 남기면 ‘자기가 물려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할 수 있다. 잡다한 물건을 모아두는 것 역시 하잘 것 없는 일이며, 만약 훌륭한 물건이 있다면 고인이 이것에 얼마나 집착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허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일본 중세 수필문학을 대표하는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52경)의 『도연초』(채혜숙 옮김,바다출판사,1만2천원)의 한 대목은 지금 입장에서 보면 덤덤하게 읽히는 보통의 산문이다.

‘도연초’는 일본에서는 에도(江戶)시대부터 지금까지, 특히 메이지(明治)시대 이후 고전 교재로 널리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수필집. 7백년전 일본인의 글은 그러나 교훈서, 그 이상이다.

‘겐지 이야기’에서 보듯 놀아울 정도로 탐미적인 글을 이미 고대에 산출해낸 일본이 중세 이후 어떻게 산문 문학을 전개하는가를 보여주는가를 간취해야 하기 하기 때문이다.

책 제목 ‘심심하고 무료한(徒然)상황에서 어떠한 격식없이 쓴 글(草)‘에서 알 수 있듯이 어디에도 얽메이지 않은 저자의 생각들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다.

이에 앞서 10세기경에 쓰인 세이쇼 나곤(淸少納言·명필로 알려진 상궁)의 수필집 ‘마쿠라노소시(枕草子)’보다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자유로워 수필문학을 연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절제된 표현과 함축적인 문장은 ‘도연초’가 갖는 가장 큰 강점이다.

칼날 번뜩이는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중세인들의 인생무상의 정신과 자연 ·인생 ·생활 ·학문 ·정치 ·예능 ·풍속 등 다채로운 세계의 모습을 2백44단의 길고 짧은 글 속에 담았다.

도연초의 내용이나 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은 굴곡 많은 겐코의 삶 자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전통시인 와가(和歌)의 달인으로 더욱 알려진 겐코는 19세 무렵 우리나라 승지 벼슬에 해당하는 6위 벼슬인 구로우도(藏人)에 임명돼 궁에 드나들었으나, 30세 무렵 출가했다.

그러나 겐코는 당시 출가승이나 은둔자들과는 달리 관동의 각 지역을 여행하고 궁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글 곳곳에 군자의 성품과 도덕성을 강조한 문장이 발견돼 ‘구니요시(邦良)왕’을 위해 쓰여진 군주론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일본의 역대 정치인 ·경영인 ·지식인들의 필독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원전에는 단순히 숫자로 분류된 각 단에 맛깔스런 제목을 달고, 상세한 각주를 통해 일본 중세의 갖가지 생활상과 동양 사상의 폭넓은 세계를 설명하는 등 이해를 돕기 위한 옮긴이의 노력도 높이 살만하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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