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품질국가 한국' 이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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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은 온 세계를 감동시켰다.

하지만 대우그룹의 도산을 비롯해 원유가 상승, 정국 불안과 노조의 빈번한 파업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한국은 새로운 경제위기에 대한 의구심 속에 21세기를 맞고 있다.

3년 전의 한국경제 위기는 태국의 바트화 폭락이 그 발단이었지만 근본 원인은 토지.노동.자본 등 유형자산의 시대였던 30년 전의 경제.산업.기업구조로 지식.기술.정보 등 무형자산의 시대인 21세기의 패러다임에 대응하려 했던 데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金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이라는 정책 목표 아래 경제.산업.기업의 세가지 측면에서 구조조정에 착수, IMF체제를 겪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빨리 경제회복에 성공함으로써 '우등생'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한국이 어째서 오늘과 같은 위기국면을 또다시 맞고 있는 것일까. 여러 언론매체나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98년 이후의 경제회복은 세계경제 호황에 힘입은 '허상(虛像)' 으로 실질적인 회복은 아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원유가 상승의 여파와 현대 등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부진한 점도 거론되고 있다.

나는 3년 전인 98년 4월 코리아제록스를 재건하기 위해 한국에 부임했다. 그동안 1천1백여명의 한국인 직원들과 회사 재건에 노력한 결과, 정리해고나 임금 삭감 없이 1년여 만에 흑자를 기록했다.

그 후에도 순조로운 판매와 이익확대를 실현하고 있다. 나는 그 열쇠로 경영의 투명성과 노사의 신뢰관계 구축을 꼽는다.

이 두가지는 '닭과 계란의 관계' 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기업들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한 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노사의 신뢰관계 구축에 노력할 때라고 본다.

이것이 안되면 한국은 또다시 경제위기를 겪을 수 있다.

세계는 글로벌화.정보화.보더리스(borderless)화하고 있고 그 속도는 21세기에 들어 더욱 빨라질 것이다.

앞으로 세계경제는 미국을 축으로 하는 북미자유협정(NAFTA) 경제권, 유럽의 유럽연합(EU) 경제권,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경제권의 3대 경제권을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한국은 높은 기술력과 고품질의 일본, 낮은 코스트와 거대시장의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다" 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나아갈 길은 어디일까.

내 소견으로는 첫째, 일본과 중국의 산업구조와 요구에 대응해 틈새적인 산업에 집중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축적된 지식과 기업가 정신으로 동북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 모든 분야에서 품질을 높여 '품질 한국' 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나는 셋째 '품질 한국' 의 이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즉 기업인은 품질경영, 정치인은 품질정치, 공무원은 품질행정을 구현해서 '품질 한국' 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조들은 이미 7백50년 전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1천여명의 각수(刻手)가 5천2백만자를 8만1천3백40개의 경판에 새긴 거대한 작품이 팔만대장경이다.

이는 세계 최초로 알려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보다도 앞선 것이다. 최근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을 통해 한 자의 오자나 탈자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놀랄 정도의 품질은 '일자삼배(一字三拜)' , 즉 글자 한자를 새기고 세번 절하여 예의를 표하는 정성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선조들은 완전한 품질을 이뤄낸 선례를 갖고 있다. 당연히 후손들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경영을 맡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다수의 기업이 하루빨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노사간 신뢰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경영품질을 높여 '품질국가 한국' 의 이미지를 쌓기 바라고 있다.

다카스기 노부야(高杉暢也) <한국후지제록스 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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