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금융, 이정도는 돼야] 9. 투명하면 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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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해 12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증권관리위원회(SEC).연방정부 건물이라 철저한 신원 확인을 거쳐 취재팀이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6층 '클로즈드 룸' 이란 회의실이었다. 방 이름에서 보듯 비공개로 5명의 증권관리위원들이 불공정 거래를 심사하는 곳이다.

방으로 들어가니 역대 위원장 사진들과 함께 원탁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6세기 잉글랜드 아서왕이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회의를 벌였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공교롭게도 레빗 위원장의 이름도 아서다.

"정직하고 깨끗한 시장을 방어하는 요충지입니다."

안내를 맡은 국제국 로버트 스트라호타 부국장이 설명했다.

SEC는 회계법인의 부실감사에 대한 조사.처벌과 관련, 준사법권까지 갖고 있다. 증인을 소환할 권한도 있다. 소환에 불응하면 연방법원에 소환장 집행명령을 요구해 강제집행도 가능하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SEC를 둘러싸고 요즘 미국 시장에서 화제가 되는 것이 있다. SEC가 정보의 불평등을 제거한다는 취지로 지난해 발표한 '공정 정보공개(FD〓Fair Disclosure)규정' 이다.

기업이 기관투자가.대주주 등 특정 고객에게 정보를 줄 때는 일반 투자자에게도 동시에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실수로 정보가 유출되면 24시간 안에 모든 투자자에게 공개해야 한다.

그러자 미국 기업들이 바빠졌다. 보도자료를 낼 때도 변호사들이 법적 하자가 없는지 문구를 일일이 검토한다.

기업설명회 대행업체들도 배포자료가 새 규정에 위배되는지 모의훈련을 하기도 한다. 시티그룹의 한 간부는 "기업설명회 도중 휴식시간에 기업 간부와 큰손들이 은밀히 모여 기업 내막을 이야기하던 관행은 사라질 것" 이라고 말했다.

스트라호타 부국장은 "정보 접근 기회에 대한 형평을 기하자는 것이 FD규정의 목적" 이라고 설명했다. 증권사나 일반기업 할 것 없이 스스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야말로 투명한 시장의 요체라는 것이다.

그는 "메릴린치가 이를 훌륭히 실천하고 있다" 고 귀띔했다.

마침 취재팀은 뉴욕에 있는 미국 최대 증권사 메릴린치를 방문했다. 제임스 위긴스 수석 부사장은 "우리 직원들은 고객들이 짜증을 낼 정도로 전화를 걸어 모든 정보를 일일이 알려준다" 며 "이것이 우리의 강점" 이라고 자랑했다.

메릴린치는 또 자체 감리 시스템을 가동한다. 만약 직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고객계좌를 다루면 '이상매매' 라는 자동 감지 시스템이 발동된다는 것.

1998년 나스닥에 상장한 두루넷의 경우 투자자들에게 배포한 기업설명서에서 회사의 약점을 38가지나 적시해야 했다.

"당사의 사업 모델은 아직 검증된 비즈니스는 아님" 이라는 등 설명서 머릿부분을 위험요인들로 채웠다. 미국 시장에서는 당연한 관행이다.

그러나 SEC가 FD규정을 만들 정도로 금융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내부자 거래가 발생한다. 정부기관이 일일이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미국 시장에서 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 자율규제라는 장치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증권업협회(NASD)산하 자율 규제기관인 NASDR.

취재팀은 워싱턴 인근 락빌에 있는 NASDR를 찾았다. 2층 세미나실에서 시장규제국의 홀리 러프 부국장과 페르난도 카브레호 부국장은 감리제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중 취재진의 눈길을 끈 것은 ADS과 SONAR.둘 다 국내에는 없는 첨단 시장 감시 시스템이다.

ADS는 단순한 통계수치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을 이용해 '이상매매 유형' 을 적출해 내는 시스템. 예컨대 수백가지 이상매매 유형을 인공지능 컴퓨터에 학습시킨 다음 이에 해당되는 이상매매가 발생하면 즉각 감지해 내는 기술이다.

현재 개발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SONAR는 유.무상증자나 합병 등 주가에 영향을 주는 뉴스를 집어넣어 컴퓨터로 하여금 이 뉴스를 읽게 함으로써 이 뉴스가 주가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 판단한다.

카브레호 부국장은 "만약 1만1천개의 새 뉴스가 나오면 컴퓨터가 이를 두시간 안에 요약해 주가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를 분석하는 차세대 이상매매 적출 시스템" 이라고 자랑했다.

마침 NASDR를 방문한 세종대 안철환 교수(코스닥 종합감리시스템 개발)는 "처음 듣는 대단한 기술"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워싱턴 NASDR 본사에서 만난 매리 샤피로 NASDR 사장의 말이다.

"규제는 곧 서비스지요. 정부의 공적규제를 최소화하고 자율규제를 최대화하면서도 이를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서비스 개념으로 인식하는 제도적 틀이야 말로 시장을 스스로 투명하게 만드는 관건입니다."

워싱턴.뉴욕.락빌〓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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