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보상' 팽팽한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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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주변에서 수(數)미상의 피란민을 살상(殺傷)했다.

'노근리 사건' 에 대해 한.미 양국이 15개월간 진상조사를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이다.

양국은 조사결과가 앞으로 피해보상 재판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큰 데다 '역사적인 문서' 라는 점을 의식, 발표문 문구 하나하나에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 결과 "피란민에 대한 사격명령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는 참전군인의 증언과 피란민에 대한 일반사격지침, 신고된 피해자 수 등을 명기함으로써 미군이 저지른 범죄임을 뒷받침했다.

미 정부가 전쟁 중 양민학살을 인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우리측 대책단장인 안병우(安炳禹)국무조정실장은 "미 대통령이 수십년 전 전쟁 중 사건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 것은 최초"라고 말했다. 그러나 몇몇 쟁점에서는 미군측 주장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한국측 당초 주장이 희석됐다.

◇ 주요 쟁점 = ▶미군에 의한 공중.지상공격과 사격명령 실행 여부▶희생자 수▶보상.배상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항공기를 동원한 공중공격에 대해서는 당시 제5공군 전방지휘소 터너 로저스 대령의 '미군 진지로 접근하는 민간인에 대한 기총공격 요청에 현재까지 응해왔음' 이라는 메모가 우리측 요구로 발표문에 들어갔다. 공중공격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미측은 '미 공군 증언자들은 이런 지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는 내용을 함께 넣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우리측은 현장 주변에서 발견한 미군 기관총 탄자 59개를 지상공격 입증 자료로 제시했다.

그러나 미측은 "발포시점 등이 명확지 않아 증거능력이 부족하다" 고 주장, '소련제 탄피도 있었으며 미군이 부상자 중 17명을 후송.치료했다' 는 내용을 함께 넣기로 결론났다.

"사격명령이 없었다" 는 미측의 주장에는 우리측이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일부 참전장병들은 피란민에 대한 사격명령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는 내용과 피란민들의 기총사격 목격담을 모두 담기로 했다.

희생자 수에 대해 당시 참전미군들은 4~2백명으로 각기 달리 증언했다. 우리측도 객관적이고 정확한 집계를 내놓지 못했다.

결국 영동군청에 신고된 피해자 2백48명을 발표문에 명기하는 데 그쳤다. 피해주민들이 요구한 개인보상에 대해 미국은 거절했다.

'사법부에서 처리할 문제' 라는 주장이었다.

◇ 협상 뒷얘기=양국은 지난해 9월까지 1년여간 자체조사를 벌였다.

이후 안병우(安炳禹)국무조정실장이 단장인 우리 대책단과 미국측은 서울.워싱턴을 오가며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특히 피해보상에 영향을 미칠 공중공격.사격명령 등 주요 쟁점에서 진통이 거듭됐다.

우리측 관계자는 "피란민에게 사격했다고 말한 에드워드 데일리 상병(당시)의 증언이 거짓으로 밝혀진 지난해 5월이 가장 힘들었다" 며 "그후 미 CBS방송이 다른 증거자료들을 보도함으로써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고 털어놓았다.

이번 발표로 노근리 사건은 일단 매듭지었으나 경북 칠곡군 왜관교 폭격 등 61건의 유사사건은 미제로 남게 됐다.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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