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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거인단 제도의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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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부시와 케리의 싸움이 엎치락뒤치락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 양상이다. 요즈음의 토론으로 케리가 열세를 만회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으나 이것마저 확실하지 않다. 미국 선거에는 선거인단 제도라는 독특한 변수가 있다. 그것은 2000년도 대선에서 부시가 일반투표에서 승리한 고어를 눌렀던 마술 같은 제도로 이번에도 이런 양상이 재연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투표 용지부터 개표 방법까지 말썽 많던 플로리다의 경우는 법정 공방으로 번졌지만 결국 선거인단 독식 제도 때문에 부시는 승리했고 고어는 깨끗이 물러났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라면 패배를 인정치 않고 선거무효 시위가 일어났음직도 하련만 그렇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선거인단 제도가 과연 민주적 형평성에 온당한 것인지 하는 의구심이 우리들 사이에서 집중 거론됐고 선거인단 독식 제도의 불합리성이 부풀려 지적됐다.

사소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제도는 건국 후 지금까지 끄떡없이 존속한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미국 나름의 독특한 정치풍토가 있다. 미국은 공화제와 연방제를 기틀로 삼아 건국했다. 시민적 책임감이 있다고 여겨지는 유산자만 투표하던 공화제는 곧 누구나가 투표하는 민주주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연방주의 원리는 건국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남아 있다. 연방제도를 새로운 정치질서로 수용하면서 미국은 여러 주의 권리를 공평하게 배분하는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큰 주는 당연히 투표 인구에 비례해 연방의원을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작은 주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존재 의의가 소멸될까봐 결사반대했다. 그 결과 의회를 양분해 하원은 인구비례로, 상원은 모든 주가 똑같이 2명을 대표로 파견하는 대타협을 이뤘다.

각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은 바로 이 상원과 하원의원을 합친 수와 동일하다. 즉 직접선거와 연방 원칙을 조화한 선택이었다. 주들은 각기 일반투표로 일단 대통령을 뽑은 뒤 선거인단을 연방으로 보내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뽑는다. 선거인단은 자기 주를 대변하므로 대통령을 한 사람만 지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식제도가 성립되는 것이다. 예전 정보통신이 덜 발달된 시대에는 선거인단 개인이 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대통령을 지명한 적이 두어번 있었다. 그러나 주의 선택 결과를 선거인단이 충성스럽게 대변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불문율이 돼 있다.

만일 이런 선거인단 독식 제도가 없고 대통령 선출이 단지 인구비례의 직접투표로만 결정된다면, 작은 주보다 몇십배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캘리포니아.텍사스.뉴욕 같은 큰 주만 대통령 후보를 돌아가며 독차지해 내놓게 될 것이다. 작은 주 출신인 클린턴이나 고어.케리 같은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는 꿈도 꾸어보지 못할 것이다.

미국 사회는 다양한 요소가 중층적.다각도로 얽혀 있어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미국 사회의 단편적 편린에 대해 제멋대로의 인상을 가질 뿐이다. 게다가 미국의 맹점만 찾으려는 요즈음 풍토에서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부정적 시각만 확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선거인단 제도의 단점은 미국에서 선거철마다 관행적으로 거론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연방의 균형을 이루는 데 이보다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의 폐습이라는 부분은 일반투표의 전국적 시행과 더불어 일찍이 해결됐다. 일반투표와 선거인단 투표의 불일치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아주 가끔씩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 선거인단 제도는 최선이 없는 곳의 훌륭한 차선책으로 건재하다. 만일 이번에도, 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개선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를지 모르지만 선거인단 독식 제도 자체가 폐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거인단의 묘미 덕분에 미국 대선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김형인 한국외국어대 교수.미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