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13년전 11월 29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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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인 경제전문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가 지난달 한 국내 신문에 기고했다. "6월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지도자가 6.25전쟁이며 아웅산테러.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에 대해 '잘못이었다' 고 용서를 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한마디 없이 느닷없는 악수였다. 왜 북한이면 무조건 용서가 되고, 일본은 언제까지나 용서하지 못하는가."

이 글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두가지. '과거사 정리 없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의구심이 일본인에 의해 지적된 데 대해 뒤통수를 한방 맞은 것 같다' '궤변이다. 이를 테면 우리 부모를 죽인 자가 혈육간 상쟁을 탓하며 스스로 먼저 진 죄값을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

오마에의 '불만' 과 그에 대한 국내의 논란은 일단 접어두자. 두달 전 한국어로 번역된 프레드 앨퍼드의 저서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 에는 이런 지적이 나온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惡)의 제국' 이라고 말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은 위협은커녕 안도감을 느꼈다. 서구의 경우 악한 타자(他者)는 환영을 받으며, 우리의 두려움에 얼굴과 장소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환영받지 못한다. 북한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준다. 한국인들은 북한을 외부의 악으로 소외시킬 만한 모종의 거리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말 그대로 여전히 가족이다. "

미국의 정치학자인 앨퍼드는 한국인에게 서구적 개념의 악이 없으며, 이는 북한의 과거 잘못들에도 적용된다고 파악한다. 한국인에게는 오히려 '세계화' 가 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1분,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기가 폭파됐다. 대부분 중동 근로자들인 승객 1백15명이 사망했다.

후에 밝혀진 범인은 북한공작원 김현희(金賢姬). 金은 대선 투표일을 하루 앞둔 그해 12월 15일 서울에 압송돼 여당 노태우(盧泰愚)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범인 압송을 선거에 이용한 것과 범행 자체는 엄격히 구분돼야 마땅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희대의 테러행위를 그냥 잊고 넘어가도 좋은 것인가. 내일은 대한항공기 피폭 13주년이고, 모레는 마침 남북화해의 상징인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 한국인은 내일과 모레 사이에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할까.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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