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문의 새 길] 11. 제3의 중국학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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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 국은 중국을 제외할 때 가장 오랜 한학(漢學)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현재 한국의 중국학의 수준은 중국.대만.홍콩.일본.프랑스.미국 등 중국학이 분과 학문으로 행세하고 있는 나라들 중에서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몇몇 분야에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업적을 이루고 있긴 하나 전반적인 수준을 두고 논할 때 한국 중국학의 존재는 국제학계에서 주목받는 처지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원인은 한국의 중국학이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있다.

대체로 한국의 중국학은 고증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 분석방법에 있어서는 구미(歐美)를 따라 가지 못한다.

따라서 현재까지 볼만한 학문적 특색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중국학의 현실인 것이다.

한국의 중국학이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한국 중국학의 정체성, 자기의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한국의 중국학자 치고 젊은 시절 공부하는 과정에서 왜,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중국학을 하는가 하는 물음에 한번쯤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한국의 중국학자들은 정체성 결핍증에 시달려야 하는가?

다시 이 원인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한국 중국학의 역사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시대에 한국의 중국학은 곧 한학이었다.

이 전통 한학은 본래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기화하여 중국.일본과는 다른 학문적 특성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 전통 한학이 중국과 일본의 경우는 자연스럽게 근대 중국학으로 이행되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양자가 이어지지 못하고 제 갈길을 가버린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의 중국학은 제국대학(帝國大學)의 관방(官方) 지나학(支那學)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전통 한학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고 한국의 중국학은 스스로를 부정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관방 지나학을 표준으로 삼았던 한국의 중국학은 해방이 되자 전통 한학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고 이때 다시 표준으로 등장한 것이 자유중국, 곧 대만의 중국학이다.

결국 전통 한학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외면하고 출발한 한국의 중국학은 그 정체성의 빈자리를 일본 지나학, 대만 중국학 등으로 채워가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대만이 세력을 잃은 지금, 앞으로 그 자리는 다시 대륙 중국학이 채울 것인가? 구미 중국학이 채울 것인가? 정체성의 결여, 그리하여 정통성이 없는 한국 중국학의 슬픈 유전(流轉)은 오늘에도 계속되어 여전히 젊은 학인(學人)들은 이 땅에서 왜 중국학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하고, 정신나간 어떤 중국학자는 한국의 고적(古籍)을 정리하기 위해 중국의 표점사(標点師.구두점을 찍어주는 사람)를 불러와야 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진정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학문행위를 계속 해야만 하는가? 노파심에서 말하거니와 이 글에서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학풍의 공부를 한 '사람들' 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개인성마저도 어쩔 수 없게 만들었던 학문제도, 권력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한국 중국학의 향방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중국학은 우선 시급히 전통 한학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식에서 중국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정체성 이후에 학문적 변별성은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 목전의 국제 중국학의 형세는 중국학의 제1세계라 할 대륙.대만 등 본토 중국학과 일본.구미 등 제2세계에 해당하는 역외(域外) 중국학의 양대 세력 구도로 거칠게 판별해 볼 수 있다.

양대 세력은 모두 나름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는데 그것은 각기 '화이론(華夷論)' 과 '오리엔탈리즘' 이다.

정체성 부재의 한국 중국학은 이 양자에 모두 침윤되어 있는 종속적인 학문 현실을 면치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중국학은 화이론으로부터도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즉 제1도 제2도 아닌 제3의 시각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 3의 시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토 중국학의 시각에서도, 역외 중국학의 시각에서도 누락된 문제점, 양자의 힘의 공백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파악해 낼 수 있는 독자적인 관점을 의미한다.

가령 위앤커(袁珂)의 '중국신화전설' 에서는 소수민족.주변민족의 신화를 모두 한족(漢族)의 신화 체계로 환원하여 기술한다.

그리고 라이샤워.페어뱅크의 '동양문화사' 에는 일본을 제외한 한국.월남 등을 중국문화의 패러디 혹은 복사판 정도로 인식하는 관념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양자에게는 동아시아 내부의 중심주의 즉 중국과 주변의 관계성을 보아낼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화이론적 관념 때문에, 구미는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적 변별성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중국학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선취하기에 유리한 학문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한국이 제3의 중국학을 건립하는 일은 중국을 해석하는 시각이 다양해 졌다는 점에서 중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아울러 기존의 두 가지 시각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다가올 동아시아 시대를 위해서도 내부에서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호혜적 인식은 선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즘 운위되는 지역연대는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만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한국 중국학이 조만간 독자적인 시각과 관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향후 거대 중국의 등장과 더불어 더 큰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중문과>

사진=박종근 기자

◇ 다음은 연극평론가 안치운씨의 '시민연극론' 입니다.

*** 제3의 중국학론은…

여기서 '제3' 이라함은 변증법적 통합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3의 중국학론' 이 청산해야할 대상은 '제1' '제2의' 시각인데, 바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의 화이론(華夷論)이다.

지금 한국의 중국학은 이 두 시각에 매몰된 채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으며, 이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기세에 영영 눌려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당당했던 옛 한학(漢學)의 전통을 제대로 수습하는 한편 고증학적 협소한 세계관에서 탈피, 그 기초 위에 새로운 방법론을 세우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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