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신…부실 늪에 빠진 공룡] 中. 방만 경영 백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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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통신 내에서 최고 인기부서는 노사협력팀이다. 1995년 심각한 노사분쟁을 경험한 뒤 '노사관계 안정' 이 최우선 경영과제가 된 때문이다.

한통의 노조 관계자는 "한통은 거대한 노무관리 회사나 마찬가지" 라며 "노조 전임자보다 회사측의 노무담당 직원이 더 많은 상황" 이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최고 경영진을 비롯한 간부들이 노조 눈치 실피기에 급급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인사 문제는 심각하다.

한통에는 정기인사가 유명무실해진 반면 노조 대의원 선거나 단체협약 교섭이 끝나면 대규모 인사가 뒤따른다.

민주노총 계열의 한 노조 관계자는 "지난해 말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회사측이 선호하는 대의원이 대거 당선되자 노사협력팀 직원들이 무더기 승진했다" 고 전했다.

한통과 거래할 때는 별도의 각서를 쓰는 게 국내 통신업계의 은밀한 관행이다. 같은 기종의 장비를 한통의 경쟁업체에 납품할 경우 공급 가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가령 제조업체가 한통에 12억원에 납품한 통신장비를 데이콤이나 하나로통신에 10억원에 공급했을 경우 가격을 밝히지 말라는 것이다.

H사 관계자는 "민간기업에 비해 한통의 납품가격이 비싼 경우가 흔하다" 며 "나중에 말썽이 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각서를 쓰는 것" 이라고 말했다. 구매과정에서 돈이 술술 새나가는 것이다.

최근 자체 감사에서는 사내에 재고품이 있는데도 케이블.회로팩 등을 추가로 사는데 전국적으로 7백억원을 쓰는 등 수십건의 예산 낭비 사례가 지적됐다.

서비스 개선보다 노무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비싼 값에 장비를 구입하는 데도 한통이 끄떡 없이 버티는 배경에는 독특한 영업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시내 전화요금을 통화당 5원 올릴 경우 한통의 추가수입은 연간 2천9백90억원. 그러나 한통은 시내전화 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한 적이 한번도 없다.

한통은 94년 이후 시외전화와 국제전화 요금을 각각 60%, 25% 인하한 반면 시내요금은 50%나 올렸다. 시외.국제전화에만 의존하는 경쟁업체인 데이콤은 출혈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후발 경쟁업체에 대한 견제도 교묘하다. 다른 통신회사의 시외전화를 이용할 경우 한통의 시외전화보다 대기시간이 보통 4~8초 더 걸린다.

전화선을 타고 들어온 신호를 다른 회사의 교환기로 넘겨주는 역할을 하는 한통의 교환기가 낡았기 때문이다.

한통은 이 병목지점에 이미 생산이 중단된 반전자교환기 M10CN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기시간을 단축시키는 신형 전전자교환기로 바꾸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데이콤측은 "경쟁업체의 통화 품질을 떨어뜨리기 위한 전략" 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동통신업체에도 한통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남아있다. 한통은 지난해 SK텔레콤으로부터 7천8백82억원의 접속료를 받는 등 유선통신망을 빌려주는 대가로 1조4천5백억원의 접속료를 거둬들였다.

접속료는 업체들간 협상으로 결정된다. 하나로통신 관계자는 "한통은 전국망(網)은 물론이고 가정까지 연결되는 유선 가입자망(시내망)까지 갖고 있어 협상에서 절대 유리한 입장" 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국내 10대 기간통신업체 가운데 한통.SK텔레콤을 뺀 8개 업체가 사실상 적자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통신업체들은 이에 따라 한통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SK와 LG는 전국망을 가진 파워콤 인수에 조(兆)단위의 자금을 투입할 태세며, 하나로통신은 적자경영에도 불구하고 유선 가입자망을 확대하기 위해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중복.과잉투자가 심각해지자 정보통신부가 나서 "다른 통신사업자들에게도 공평하게 시내망을 개방하라" 고 압박하고 있지만 한통은 요지부동이다.

미국은 84년 AT&T를 장거리전화회사와 22개의 지역 전화사업자로 분리하고 시내망에 대해 모든 사업자가 동등하게 접속할 수 있도록 의무화했다.

일본도 지난해 NTT를 순수 지주회사로 남기고 장거리 전화회사와 동.서 지역회사 등 3개로 분리한 뒤 임원 파견이나 공동구매를 금지하고 모든 업체에 동등한 시내망 접속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일본은 정치권의 결단에 의해 거대 공룡을 분할했다. 통신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 민영화보다 회사 분할을 우선한 것이다.

참여연대의 이상훈 변호사는 "한통 문제는 내부적으로 불합리한 인사, 외부적으로는 독점체제에 기인한 것" 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한통의 민영화가 최선의 대안이지만 정부 소유 주식을 일반에 매각하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혁신이 쉽지 않을 것" 이라며 "NTT처럼 지주회사와 몇개의 사업체로 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고 말한다.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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