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비극의 상징 '노벨 평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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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적마다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멀건히 바라만 봐야 했었다. 열등감만인가. 자존심도 상하고 샘도 났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당당히 노벨상 수상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기분 좋다. 어깨가 으쓱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거리엔 온통 축하 열기로 넘쳐 있다. 당연하다. 하지만 우린 이제 냉철한 이성으로 평화상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우선 노벨평화상은 평화의 땅에 주어지진 않는다. 전쟁.유혈.분쟁.기아.탄압.차별.갈등….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불행과 비극으로 얼룩진 땅에 주어지는, 그 명예만큼이나 아픈 상이다.

노벨평화상은 그 자체가 비극의 상징이다. 평화상이 어떤 노벨상보다 값진 것은 그래서다. 그 비극의 땅에 평화와 희망의 꿈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불굴의 의지와 인내,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나친 축하도 자칫 그 맑은 정신이 훼손될까 두렵고, 수상자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

평화상을 준다고 평화를 주는 건 아니다. 겨우 서광이 비친 것뿐, 길은 지금부터다. 우리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이 때문이다.

아직도 한반도엔 긴장의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다. 국력을 키워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평화는 힘이다.

힘 없이는 평화를 이룩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다. 화해 무드에 들떠 한 점 빈틈이 없어야겠다. 그러는 한편 대화와 인내.협력을 바탕으로 평화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

수상 이유가 민주화.인권.남북화해인 데도 국민의 기대는 온통 국내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경제에서 국민화합까지 주문이 다양하다. 수상자가 현직 대통령이요, 집권정당 총재이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 점이 축하와 함께 걱정이다.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자칫 평화상의 영예에 흠집이 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다. 총재직을 떠나야 한다는 의견도 아끼는 충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현실이 워낙 답답해서겠지. 수상을 계기로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들고 있는 건 요술 지팡이가 아니다. 복지 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실제로 수상 후 몰락한 인사도 있고 갈등의 골이 깊어 전쟁위기에 빠진 곳도 있다. 우린 결코 노벨상의 명예를 실추시켜선 안된다. 노벨상 수상 국민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일부에선 걱정스런 시각도 적지 않다. 평화상 때문에 경제가 흔들린다는 사람도 있다. 최근 우리가 북한에 보여준 양보나 협조가 '우리 형편에 저래도 되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젠 경제다!' 하는 들끓는 여론도 이러한 걱정과 맞물려 있다. 국민화합에의 주문도 정치적.지역적 소외감에서 나온 소리만은 아니다. 객관성은 차치하고 이러한 국민의 정서도 겸허히 듣고 읽어야 한다.

우린 이 점에서 수상자도 국민도 큰 짐을 진 셈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도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와 포용으로 감싸는 아량이 필요한 시점이다.

불행히 우리 민족은 이 점에서 결정적 취약점을 갖고 있다. 우린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내 주장만 하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지 않는다.

거기에다 우린 너무 감정적이고 좁쌀스럽다. 자질구레한 지엽적 문제에 매달려 말 한마디에 나라 일까지 꼬이게 만든다. 이제야말로 의젓한 대승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하여 모처럼 탄생한 세계적 인물에 흠이 가게 해선 안된다. 우린 인물을 가꾸기에도, 그리고 인물을 아끼는 데도 참으로 인색한, 옹졸한 백성이다.

부끄럽지만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큰 눈으로 보자. 그리하여 세계적 인물이 되게 해야 할 책임이 본인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되겠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지구촌을 둘러보자. 환경.전쟁.빈곤…. 어려운 나라에도 따듯한 눈길로 위로.격려하며 지구촌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

긴장과 비극의 역사, 한반도. 이제 그 비극의 땅에 평화가 정착되게 하자. 그리하여 다시는 이 땅에 노벨평화상만은 없어야겠다. 이것만은 한번으로 족하다.

김대중 대통령께 다시 한번 축하와 감사, 그리고 격려를 드리며.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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