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중퇴생 유학 성공담 '미국이 놀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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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사적인 기억 하나. 고등학교 1학년 영어시간은 항상 책검사로 시작했다.

영어선생님이 직접 쓴 교재 맨 앞장에 자기 이름을 볼펜으로 써 놓아 '내 돈 주고 산 것' 임을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하면 '불경죄' 로 한대씩 맞은 후에야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 다른 기억. 미술선생님이 학교 근처 백화점 화랑에서 전시를 했다.

'부모님께 화랑에 한번 들르라고 전하라' 는 통고 덕분인지 무명화가인 선생님 그림이 모두 팔렸다는 소문이 한동안 학교에 떠돌았다.

입시 위주 교육제도의 문제든, 이 제도가 빚어낸 일부 선생님들의 질 저하든 학교는 오랫동안 학생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학교제도에서 이탈한 '부적응자' 뿐 아니라 제도에 순응한 모범생들에게도 학교는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밀턴 아카데미 입학 허가를 받은 고등학생 허창희(17)군이 쓴 '미국이 놀란, 창희의 유학작전' 은 10여년이 지나도 전혀 바뀌지 않은 이런 교육 현실을 직접 겪었던 고민과 갈등을 고스란히 담았다.

제목만 보면 최근의 조기유학 바람을 탄 얄팍한 가이드북같지만 조기유학을 떠나는 사람이나 남은 학생 모두에게 우리의 교육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창희는 본인 말대로 '도피유학생' 이다.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명문 학교에 들어갔지만 한국에선 자살 기도까지 했던 낙오자일 뿐이었다.

중학교 때 전교 부회장을 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했고 음악.컴퓨터.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열어놨던 창희가 엇나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첫 시험. '시민의 개념을 정의하라' 는 문제에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이라고 썼지만 5점 만점에 0점을 받았다.

교과서에는 '민주사회의 구성원' 이라고 돼있는데 '민주' 란 단어가 빠져 있어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교과서대로' 를 요구하는 학교와 '스스로 사고하기' 를 포기하지 않았던 창희는 서로 멀어졌고, 창희는 침대 시트를 찢고 새벽에 미친듯이 피아노를 두들기는 정신분열 상태까지 갔다.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소외되는 제도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불현듯 생각난 게 유학이었다. 이때부터 인터넷 서핑을 하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네이티브 스피커와 일대일 회화를 해왔기에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e-메일을 주고 받으며 창희는 점차 미국 명문학교를 향한 꿈을 구체화했다.

입학에 필요한 SSAT(미국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필수시험)와 토플을 준비하면서 인터뷰 일정도 잡았다.

창희가 성공적인 유학의 첫발을 내딛일 수 있었던 건 밀턴 아카데미의 밥 선생님과의 만남 덕분이다.

밥은 밀턴 아카데미가 한국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개최한 유학설명회에 온 밀턴의 영어선생님. 창희는 밥이 흑인이라는 점에 착안해 인터뷰에 앞서 흑인문화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 결국 밥을 매료시켰다.

창희는 밀턴 외에 케네디의 모교인 초트 로즈매리 홀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모델이 된 세인트 앤드류, 전통 명문 필립스 앤도버, 이보다는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힐 스쿨 등 몇몇 학교에 원서를 냈지만 대부분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대에 못미치는 SSAT점수 때문에 입학허가를 확신했던 밀턴에서조차 대기자 명단에 올랐을 뿐이고, 힐 스쿨에서만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던 중 창희의 가능성을 인정한 밀턴으로부터 합격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이미 자신감을 잃은 창희는 힐 스쿨로 가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밥으로부터 뜻밖의 e-메일을 받는다.

A4 용지 다섯 장에 걸쳐 창희가 얼마나 훌륭한 학생이며 밀턴이 얼마나 창희를 원하는지를 설명하며 밀턴에 올 것을 설득한 것이다.

밥의 열성 덕분에 창희는 지금 보스턴 밀턴 아카데미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이 책은 분명 조기유학 성공스토리다. 하지만 창희는 교육제도를 문제삼아 유학을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충고한다.

같은 제도 속에서 적응을 잘하는 학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적응을 못했다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창희는 "유학을 권하는 건 노력파 학생들에게 도리가 아니다" 면서 "내게도 유학은 최선이 아닌 차선" 이었다고 말한다. 무조건적 환상을 버리라는 뜻일 게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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