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고위층 '바꿔'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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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9일 오후 유고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인터컨티넨털 호텔. 유리.가전제품.의약품 등을 만드는 유고의 대표적 기업인 게넥스사 라도만 보조비치 회장은 호텔 입구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보조비치 회장에게 "당신은 회사 재정이 악화됐다고 직원들을 마구 해고하면서도 스스로는 대리석과 오크로 장식된 5층짜리 건물에서 고가 예술품을 걸어 놓고 호의호식했다. 이제 물러나라" 고 말했다.

보조비치는 코웃음을 치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성난 노동자 수백명과 마주쳤다. 세르비아 총리를 지낸 보조비치가 게넥스사 회장이 된 것은 지난해 3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대통령과의 친분 덕분에 낙하산 인사로 회장이 된 것이다.

이같은 막강한 배경 때문에 직원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하루의 대규모 시위로 독재자 밀로셰비치를 쫓아낸 시민혁명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결국 보조비치는 이날 "전 경영진이 사퇴한다" 는 각서를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갔다. 유고의 전 분야에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기업.은행.대학 등 곳곳에서 밀로셰비치와 연계해 있던 구 여권 인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밀로셰비치의 최측근인 모미르 불라토비치 유고 연방 총리는 9일 이미 물러났다. 세르비아 경찰을 지휘해 온 블라이코 스토일리코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내무장관도 사임 의사를 밝혔다. 보건.관광장관도 사임을 표명했으며 국영기업 간부들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있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가장 거셌던 노비사드 대학에서는 대부분 학장과 운영진이 이미 자리에서 떠났다.

복권사업 기관은 노조원들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11일 이런 현상을 전하면서 "부작용도 우려된다" 고 보도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야당연합의 강경파들이 무장 요원들을 동원해 경찰.세관.국영기업을 접수하는 일도 벌어지는데 새로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도 자칫 개혁 작업이 폭력화할까봐 걱정한다는 것이다.

기득권층 일부는 "정부가 과격한 시위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며 반발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돼 온 새 정부 구성 작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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