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문의 새 길] 8. 신음양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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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은 우리 문화 안에서 전통적으로 천문학이나 의학과 같은 과학 방면 뿐만 아니라,점술.풍수지리.건축.의복.식생활.도덕규범.예술 등의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음양조화를 우주적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원리를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음양오행에 대한 나의 관심은 우선적으로는 문화인식론적 관점에서였다. 우리의 문화나 사고방식이 서양문화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데, 이 차이를 조명하지 않고서는 서양문화를 제대로 수용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와중에서 그 철학을 배태한 문화적 뿌리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것인가를 발견할 때마다 나의 문화적 뿌리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잘 알아야 남의 것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철학을 잘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의 문화적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여성으로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 안에서 여성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유와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한, 그리고 여전히 여성을 침묵과 음지의 세계에 머물게 하고 있는 가치체계의 핵을 들여다 보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음양사상을 마주 하게 되었다. 음양이분법의 도식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우리 문화 안에서 여성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음양오행의 체계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거대한 분류체계이다. 그것은 사물이나 현상들 간의 횡적 연관을 확장해가면서 모든 것을 몇 가지로 패턴화한다.

서양의 사유체계가 연역과 귀납의 방법에 기초하여 종적인 체계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이 횡적 연관의 체계 안에서는 비슷한 것들끼리 같은 범주에 속하면서 비슷한 성질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패턴들 간에는 어떤 원리, 예를 들면 서로 돕거나 이기고 지게 하는 원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밝은 것.털이 있는 것.높은 것.뜨거운 것.귀한 것.움직이는 것.강건한 것들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었고, 어두운 것.비늘이 있는 것.낮은 것.차가운 것.천한 것.정지한 것.유순한 것들은 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하늘.군주.남자 등이 땅.신하.여자에 대해서 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하늘.군주.남자가 사실상의 공통점이 있어서 양에 속했다기 보다는 가부장적 봉건군주제의 정치질서 안에서 강건함과 존귀함의 성질을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 연관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양에 속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이렇게 범주화가 되면 그것은 자연의 도리로 화하여 이에 저항하면 천리를 위반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음양은 사물이나 현상 자체가 갖고 있는 객관적 성질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그것을 적용함으로써 사물이 그러한 성질로 규정되도록 하는 의미원리라고 할 수 있다.

여자는 그 본성상 유순하고 비천하기 때문에 음인 것이 아니라 음의 범주에 넣어짐으로써 음에 속하는 다른 것들과의 연관 안에서 비천함과 열등함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시대의 가치체계가 범주적 고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남자는 본성상 높은 하늘이고 여자는 본성상 낮은 땅인 듯이 여겨졌다.

신음양론은 음양이분법을 안으로부터 해체한다. 안으로부터 해체한다는 것은 다른 개념을 빌어 음양이분법을 파괴하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 개념을 재사용하면서 그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음양을 사물의 본질로서 보지 않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로 보며, 음양을 과학적 개념으로 보다는 문화적 은유로 규정한다.

의미부여의 원리로서의 음양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과 남성은 각각 음과 양이라기 보다는 모두 맥락에 따라서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하는 음양적 존재이다. 이것은 한의학의 관점과도 부합한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음양의 조화가 잘 되어야 건강을 유지하듯이 한 인간 내에서도 부드러움과 강건함, 그리고 소위 남성적 성질이라고 하는 것과 여성적 성질이라고 하는 것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이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서 전통적 음양 개념은 여전히 자연스럽고 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음양이라는 문화적 은유가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음양론은 여성을 음양적 존재로 봄으로써 음에 속하는 음습하고 열등한 것들과 여성을 묶고 있는 질긴 고리를 끊어내고 그 고리에 기초한 문화적 은유체계를 해체한다.

가정은 더 이상 바깥주인(양)과 안사람(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남편은 하늘이 아니다. 신음양론 안에서 우리는 가부장제적 가족 개념으로부터 민주적이고 확장된 가족 개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음양화합의 결과로 생긴 아이들이 있는 가정만 정상 가정이고 기타 가족 형태는 기형 또는 결손으로 간주되어 사회적 차별을 받는 일을 막을 수 있고 음과 양은 각각 기능이 다르다고 봄으로써 성별분업을 고착화하거나 여성이 바깥(양)에 나가 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호주제 철폐나 고용평등과 여성의 일할 권리의 확보, 가사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여성을 영원히 강건한 남성의 유순한 보조자로 놓는 음양도식을 해체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 다음은 인하대 성완경 교수의 '만화예술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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