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위안스카이와 望月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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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 도봉산에는 망월사라는 고찰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한 절이다. 망월사는 그 현판이 중국의 청말 민국초의 풍운의 인물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써여졌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판의 왼쪽에는 “駐韓使者袁世凱”라는 글로 자신을 밝히고 있다. 쓴 때가 “光緖 辛未仲秋之月”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조선을 떠나기 3년전인 1891년도였다.
袁世凱는 청말 북양대신 李鴻章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약관의 나이로 임오군란(1882)을 진압하러 온 淸군과 같이 조선에 왔다. 그는 일본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등의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을 실패시킨 공로로 민씨일파를 등에 업고 내정을 간섭하는 등 실질적으로 조선총독으로 군림하였다.
조선말 화가 오원 장승업이 하루는 도화서의 부름을 받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궁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가 그릴 그림이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袁世凱의 생일 선물로 바칠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 궁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위안스카이는 귀국하여 조선에서 익힌 군사기술 및 정치외교 감각을 살려 청말 최고 실력자가 되었고 청의 마지막황제 溥儀를 퇴위시켜 신해혁명을 성공시킨다. 그는 혁명당 孫文등의 요청으로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 되고 황제가 될 야심을 가진다.
袁世凱는 안동김씨등 세 명의 조선 여인을 첩으로 삼았다. 그 중 안동김씨 소생인 韓中 혼혈 커원(克文)은 아버지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정실 于씨 소생 장남 커딩(克定)과는 달리 아버지가 무리하게 황제가 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커딩은 자신이 황태자가 될 욕심으로 일본이 袁世凱를 지지한다는 가짜기사가 실린 신문을 위조하여 袁世凱의 결심을 끌어 냈다. 우유부단했던 袁世凱는 그 신문기사가 진짜인 줄 알고 황제즉위를 최종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克文이 형이 만든 가짜신문을 처음 발견하여 형이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힌
비행(欺父誤國)을폭로하였다.중화제국의홍헌(洪憲)황제(1915.12.12-1916.3.22)로 즉위한 위안스카이는 100일만에 퇴위하고 실의에 지병이 악화되어 죽는다(1916.6.6). 불과 56세 였다.
袁世凱 사후 克文의 집안은 매우 어려웠으나 그의 아들 지아류(家騮)는 燕京대학의 장학생으로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미국인 대학총장의 도움으로 도미유학을 가게 된다. 당시 燕京대학은 1919년 설립된 미국의 미션계 대학으로 1952년 폐교되고 당시 시내에 있던 北京대학은 燕京대학의 캠파스를 인수하여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미국으로 간 지아류는 화교출신의 여류과학자와 결혼하고 노벨상의 후보가 될 정도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으나 2003년 사망하였다. 그의 외아들 웨이청(袁緯承)이 아버지를 이어 물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袁世凱는 출세욕과 야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가 젊은 시절 도봉산에 올라 망월사의 현판을 쓴 것은 望月이 과거 신라의 수도 월성(경주)을 바라 보면서 왕실을 안녕을 빌었다는 순수한 의미와 달리 멀리 떨어진 北京을 바라보며(望京) 출세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였는지 모른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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