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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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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한때 우리 농촌에는 남의 집 변소를 절대 안 쓰는 어른이 많았다. 밭에 천연 거름을 한 번 더 내려는 마음에 급해도 참았다는 노인들 얘기가 찡했다. 시골길에서 풍기던 냄새는 도시인에게는 악취였지만 농작물을 키우는 농부에게는 성장의 향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냄새는 힘을 잃었다. 가을이 오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람마다 풍기는 독특한 체취는 희미해졌다. 가족이나 가까운 이를 구별할 수 있는 몸냄새도 코끝에서 멀어져 간다. 냄새가 없애야 할 미개인의 한 징표가 됐기 때문이다. 방향.방취제나 향수.향료 같은 인공의 냄새가 자연의 냄새를 침묵시켜 버렸다.

냄새를 문화사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냄새가 평가절하된 때가 18, 19세기라고 지적한다. 찰스 다윈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과학자가 후각을 광기와 야만의 감각이라고 규정하면서 후각은 오감 가운데 뒤로 처지게 됐다는 분석이다. 대신 시각이 이성과 문명을 이끄는 으뜸 감각으로 재평가받으면서 현대는 보는 것이 최고인 영상 시대, 이미지 세상을 맞았다.

냄새와 정치 사이의 상호 관계를 따지는 이도 있다. '1984년'을 쓴 소설가 조지 오웰은 "서구사회 계급 구분의 진짜 비밀은 소름 끼치는 한마디, 즉 '하층 계급은 냄새가 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갈파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 정책에 써먹은 혐의 가운데 하나도 유대인에게서 악취가 난다는 낙인이었다. 백인이 유색인종에게서 역한 냄새가 난다고 차별하는 일은 뿌리가 깊다. 서구 백인은 자신도 다른 인종이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잊은 듯 보인다.

미국 신경생리학자 리처드 액설과 린다 벅은 인간이 후각을 통해 냄새를 느끼는 과정을 처음 밝혀 올해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두 과학자는 인간이 1만가지의 서로 다른 냄새를 가려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잊혀졌던 후각의 세계가 재발견된 순간이다. 이들의 업적으로 냄새를 맡지 못하는 후맹증 치료나 기능이 뛰어난 인공 코 개발 등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향내 없는 사과 상자나 비린내 안 나는 굴비 상자를 덥석 받은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은 혹시 후맹증 환자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돈 냄새도 악취로 치자면 만만치 않기에 더 그렇다.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나왔으니 다행이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