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내가 이회창총재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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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밖에서 보는 이회창(李會昌)총재의 행보가 영 시원치 않다. 따져보면 이회창씨 탓만은 아니다. 현직 대통령이 국정 어젠다를 선점하고 국민들을 감동시키니 야당 총재가 설 자리가 없다.

아무튼 다음 대선까지 2년여 남았다. 李총재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그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프로골퍼 타이거 우즈의 우승확률에 턱없이 못미친다. 그래도 현재로선 李총재가 다른 이들에 앞서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李총재라면' 이라는 전제 아래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현직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차기 대통령감으로서 할 일과 해선 안될 일들을 정리해 보겠다. 상당 기간 국내 분위기를 뒤흔들 남북관계만 얘기한다.

첫째, 남북관계에 있어 대통령 뒷다리 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산가족 상봉으로 국민들을 울린 대통령의 역량을 인정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대북정보에서 정부에 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북정책만큼은 한동안 金대통령이 압도할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혹여 그런 대통령의 행보를 집권연장 기도라 매도한다면 내 발목에 족쇄 채우는 짓이다. 한마디로 방향이 제대로 잡힌 현정부 대북정책의 큰 틀만은 승계하겠다는 기분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내 할 일은 대북포용 기조(基調)에 동조하면서 국민에게 재정부담을 지우는 부분만큼은 철저히 국회 논의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국회가 놀고 먹는다는 국민들의 비난도 생각해야 하니까. 방향을 이쪽으로 잡는다면 대통령이 헛발 딛거나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의 변덕으로 일이 틀어질 경우에도 책임의 대부분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지게 된다.

결국 현정부가 잘 할 경우 업적에 대한 점수를 조금은 나눠가질 수 있고, 혹시 실수할 경우라도 동반자살의 가능성만은 피하겠다는 계산이다.

둘째, 金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어쩔 수 없이 남북관계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대북정책을 중심축으로 주변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없다. 미국. 중국을 끌어들인 또다른 형태의 4자회담 발상도 같은 얘기다.

그러나 우리 역량의 한계와 한반도 주변열강들의 이해타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설정은 적잖이 속을 썩일 것이다. 자신들이 미처 준비 안된 상황에서 밀어닥칠 남북관계의 변화를 팍팍 밀어줄 선량한 이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이회창 총재)는 주변으로 눈을 돌리겠다. 주변국의 유력인사들을 두루 만나 그들의 입장과 우려를 청취하되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에 흠집 내는 말은 삼가겠다.

오히려 현정부의 정책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와 더불어 대안을 논하는 기회로 삼겠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차기 지도자로서의 위상과 권위를 쌓는 노력은 여타 후보들과의 차별화 전략이기도 하다.

김대중씨가 야당 시절 대통령이 될 준비하며 했던 일들을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셋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얘기다. 정부의 배려(?) 덕분인지 아니면 야당진영 공작의 산물인지 李총재와 金위원장의 면담얘기가 나돌아 다녔다. 잘라 말해 李총재가 서두를 일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할 때 기회 보아 만나자" 고 하면 될 일이다.

현정부와 북측에 공을 차버리고 의연한 자세를 취하는 플레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야당총재가 서둘러 평양 안간다고 뭐라 할 사람 없다. 뾰족하게 쌈박한 대안이 없을 때는 정부나 북측에게 모두 신경 쓰이는 존재로 남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손해가 없을 일 하나를 덤으로 보탠다. 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세련되게 지지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겠다. 노벨상은 국민들의 자랑일 수도 있다. 더욱이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주도한 혐의를 받는 金위원장과 동시수상이 실현될 것 같지도 않은즉 '민주주의의 투사이며 남북화해의 계기를 마련한 지도자' 란 점을 앞세워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지지하겠다. 차기 대통령감으로서 잃을 바 없다고 본다.

워싱턴에서 길정우 <본사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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