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한국 금융회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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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기업에 인도는 기회의 땅이다. 싼 비용 덕분에 제조 기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현대자동차·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의 대기업도 이미 이곳에 진출했다. 인구 11억의 내수 시장이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다. 이렇게 제조업체에 매력적인 시장이 금융산업에는 어떨까.

아쉽게도 한국 금융사들에는 인도가 아직은 낯선 곳이다. 인도에는 한국계 은행(신한은행)과 자산운용사(미래에셋자산운용)가 각각 한 곳씩만 영업 중이다. 우리·하나·외환·수출입은행은 연락사무소를 두고 영업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보험사 중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시장 조사를 위한 사무소를 두고 있을 뿐이다.

현지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융회사가 인도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로 규제와 미성숙한 시장을 꼽는다. 지난달 중순 뉴델리 중심가의 신한은행 지점에서 만난 허영택 뉴델리 지점장은 “인도에서는 영업 기금의 15%까지만 한 기업(또는 개인)에 대출할 수 있는 ‘동일인 대출 한도’가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금이 적으면 활발한 영업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다. 신한은행의 경우 뉴델리와 뭄바이지점을 합쳐 자본금이 5800만 달러다. 이에 따라 한 기업에 대출할 수 있는 규모는 최고 870만 달러(약 99억원)에 불과하다. 이렇다 보니 자금수요가 많은 기업들은 한국 은행과 거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의 한 대기업 관계자는 “설비 투자에는 보통 수억 달러가 들어가기 때문에 대규모 자금 조달은 서울이나 홍콩의 은행을 통해서 하고, 주거래 은행도 외국계를 쓰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뉴델리사무소 박경순 선임조사역은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금융회사가 한국 기업만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서는 현지시장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며 “글로벌 은행과 정면 승부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활발하게 영업하는 외국계 은행들은 과감한 투자로 현지화 전략을 꾀하고 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지점이 90개가 넘고, HSBC·씨티·ABN암로의 지점은 20~40개 수준이다. 이들 은행은 모두 자본금이 10억 달러가 넘기 때문에 현지 은행과 경쟁하는 수준이다. 자본금이 많기 때문에 동일인 대출한도 범위 안에서도 현지 기업에 대규모 대출을 할 수 있다. 국내 금융사들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대규모 투자를 고려하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개인 대상 영업도 개척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한국 은행들은 지금 현지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김역동 신한은행 뭄바이 지점장은 “개인의 카드 연체율이 15%를 넘기 때문에 개인 신용대출이나 신용카드 사업에서는 글로벌 은행들도 수익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인도 기업들에 대해서는 리스크 관리 능력이나 정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김 지점장은 “인지도가 없는 인도 기업에 대출을 한다고 하면 본점에서도 승인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도 금융시장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란 게 금융권의 공통된 견해다. 인도 은행의 총자산과 대출금은 2006년부터 매년 20% 이상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영택 신한은행 뉴델리 지점장은 “한국 은행들이 소매 시장에 진출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며 “리스크 관리 능력과 정보력을 향상시켜 인도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인환 우리은행 뉴델리 사무소장은 “인도는 가치가 큰 시장”이라며 “지금 아닌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준현(베트남·캄보디아), 김원배(인도네시아), 김영훈(미국), 조민근(중국), 박현영(인도·홍콩), 한애란(두바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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